아시아의 역사

장쭤린 폭살 사건(황고둔 사건)이란? 일본 관동군의 폭탄 테러 배경과 결과

시대적 배경이 앞선 글과는 다소 다르지만, 이번 글에서는 중국 군벌 펑톈파의 영수 장쭤린이 1928년 일본 관동군에 의해 폭살된 사건, 이른바 '장쭤린 폭살 사건'(황고둔 사건)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에 일본이 개입한 것 아니냐?"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설도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관동군이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통설대로 관동군이 범인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장쭤린 폭살 사건 이전의 시대 상황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관동군이 관동주총독부에서 분리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전후 불황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1921년에는 4개국 조약이 체결되면서 기존에 유지되어 온 영일 동맹이 종료되었고, 일본의 국제적 고립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여기에 일본 국내에서는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고, 그 재해 복구 마저 실패하는 등 내우외환의 연속이었습니다.

한편 관동군 주둔지 인근인 중화민국에서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916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군벌 시대'로, 여러 군벌들이 일본·미국·영국·소련 등 각국 세력을 배경으로 병립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중화민국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성립하면서, 양당은 중국 통일을 목표로 손잡고 북상 작전(북벌)에 나서게 됩니다.

세계 정세를 좀 더 넓게 보면, 1917년 소련의 레닌이 발표한 '평화 포고'가 민족 자결을 제창했고, 이듬해인 1918년에는 미국이 민족 자결권을 포함한 14개조 평화 원칙을 내걸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은 관동군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 자결' 사상은 중국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일부 세력은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기도 했고, 그 뒤에는 소련의 영향력이 드러나거나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치안 유지를 주요 임무로 삼던 관동군에게 이는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 사회주의 사상이란 (간단히 말해) 계급과 착취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으로, 천황제와 사유재산을 부정하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북벌에 대한 대응책으로 벌어진 장쭤린 폭살 사건

북벌은 관동군과 일본 모두에게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어떤 식으로든 대응이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장쭤린 폭살 사건입니다.

당시 일본 내각은 북벌에 대한 대응책으로 만주를 근거지로 하는 펑톈파를 지원하는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다나카 기이치는 펑톈파 군벌 영수인 장쭤린과 오랜 교분을 지니고 있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장쭤린의 군벌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그는 일본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특히 중국 진출이 늦어졌던 미국의 지원까지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장쭤린을 계속 지원하며 군벌을 통한 간접 지배를 추구하던 내각과, 이것이 이미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관동군 사이의 균열은 점차 커져 갑니다.

그런 가운데 장쭤린의 펑톈파는 북벌에 패배하여 베이징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움직이기 시작한 것 자체만으로도 성가신 상황이었지만, 북벌에 맞설 저항 세력으로서의 능력마저 의심받으면서 관동군 내 일부에서는 장쭤린 제거를 추진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그 움직임이 실제로 실행된 것이 1928년 6월 4일의 장쭤린 폭살 사건, 즉 황고둔 사건입니다.

베이징에서 봉천(만주 방면)으로 돌아가던 도중, 장쭤린이 탑승한 열차 전체가 폭파되어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었습니다.

장쭤린 폭살 사건은 육군 상부나 내각에 보고되지 않았으며, 일부 인물들만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동군의 '폭주'가 처음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사건 무렵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쭤린 폭살 사건의 결과는?

펑톈파 장군이었던 장쭤린이 사망한 후, 만주를 이어받은 것은 그의 측근들의 지지를 받은 아들 장쉐량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된 장쉐량은 그때까지 적대 관계에 있던 장제스의 국민당과 손을 잡고 대일 항쟁 노선으로 전환합니다. 대신 국민당에 완전히 귀순하는 형태가 아니라, 만주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불간섭을 허용받는 조건으로 협력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일본의 만주에 대한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은 결국 만주사변(1931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