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소일기본조약이란? 체결 배경과 이후의 일소 관계

앞서 소일중립조약에 대해 다룬 적이 있습니다. 일본과 소련은 그 외에도 소일기본조약과 소일공동선언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왔는데요.

근대사 속 일본과 소련의 관계를 이해하면 오늘날 양국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일본과 소련의 기본적인 관계를 규정한 조약인 소일기본조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소일기본조약이란?

1925년(다이쇼 14년)에 체결된 소일기본조약은 일본과 소련 간의 기본적인 관계를 정한 조약입니다. 일본의 가토 다카아키 총리와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 명의로 체결되었으며, 실무에서는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상과 소련 측 카라한 외교 담당자가 조약 체결을 진행했습니다.

소일기본조약의 주요 내용

  1. 상대국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국교를 수립한다
  2.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3. 포츠머스 조약은 소련과의 사이에서도 유효하다
  4. 일본이 북사할린의 석유·석탄 개발권을 취득한다

이러한 내용이 담겼으며, 조약 체결 후 일본은 북사할린에 주둔하던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일러 관계의 흐름

러일전쟁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서로 원한을 품고 있어 곧바로 협정을 맺을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은 점차 다가서게 되었고, 여러 차례 협정을 체결하며 서로의 세력권을 설정하고 실효성 있는 관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도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러시아 혁명은 영일동맹으로 인해 연합국에 가담했던 일본에게는 불편한 사건이었습니다. 연합국은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군대를 파견했는데, 일본도 이에 동참하게 됩니다.

일본은 러시아와 협정을 맺어 온 사이였지만, 영일동맹에 휘말려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했고, 여기에는 러일전쟁 이후 상실한 권익을 회복하고 영토적 야심을 실현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5년 가까이 장기화되었고, 일본은 막대한 전비와 인력을 투입했음에도 거둔 것이 거의 없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소일기본조약의 체결

당시의 외교관 시데하라 기주로는 협조외교를 추진하여 일소 간 기본조약 체결에 나섰습니다. 협조외교란 여러 차례 협의를 반복하며 다른 국가들과 협력해 가며 펼치는 외교를 말합니다.

협상이라면 서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국운이 융성할 때였기에 이런 유화적인 외교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고, 5·15 사건 이후에는 군부가 주도하는 강경한 노선의 외교가 펼쳐지게 됩니다.

소일기본조약을 체결하게 된 이유

당시 일본이 소련과 조약을 맺어야만 했던 사정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

일본 측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 문제였습니다. 일본해 연안의 항구 도시들은 소련 연해주(프리모르스크 지방)와 무역을 해왔지만, 일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교역이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홋카이도 오호츠크해 연안에서 조업하던 어민들이 소련 측의 방해를 자주 받았고, 어민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민간 차원에서 대소 관계 악화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정부에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정부 역시 이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소련의 중국 진출

같은 시기 소련은 점차 안정을 찾으면서 시선을 국내에서 국외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련은 중국과의 협력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만주에서 러일전쟁을 통해 취득한 일본의 권익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등장했고, 소일기본조약 체결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세계적으로는 사회와 경제의 구조를 놓고 두 가지 사상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유럽과 미국에서 발전한 사상으로, 개인과 기업의 재산을 보장하고 이윤 추구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메커니즘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의 힘이 강한 반면, 임금 노동자의 힘은 약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고용주인 자본가의 한마디에 따라 처우가 좌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을 견뎌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황제와 귀족, 자본가를 타도한 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습니다.

그 지도자인 레닌은 사회주의 사상을 활용해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섰습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사회주의는 토지나 공장 같은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여 특정인이 독점하는 것을 막고, 모두가 평등하게 부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지향합니다.

실제로 레닌은 귀족과 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이 사상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소련의 성립은 세계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결과,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보인 국가는 많지 않았습니다.

치안유지법의 제정

일본도 그러한 국가 중 하나였지만, 앞서 말한 이유들로 인해 소일기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에 물들지 않도록, 소일기본조약 체결 후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국체 변경(국가 체제의 전복)이나 사유재산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의 결성을 금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 체제의 변경을 허용하면 일본에서도 러시아 혁명과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만약 그런 혁명이 일어난다면 천황이 폐위되고 대일본제국헌법 아래 만들어진 일본 사회 전체가 붕괴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함으로써, 비록 조약 체결 후 소련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일본에 들어오더라도 혁명을 일으킬 만한 활동은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소일기본조약 이후의 일소 관계

1931년 일본이 만주국을 세웠을 때, 소련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소련과 만주의 권익을 지키려는 일본은 조약 체결 후에도 여전히 긴장 상태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만주에서는 관동군과 소련군 사이에 여러 차례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그중 가장 큰 전투가 바로 할힌골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열세에 몰린 일본은 이후 소련 영토에 대한 침공을 자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소련 양국의 관계는 더욱 극단적으로 흘러갔고, 곧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게 됩니다….

그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는 소일중립조약 관련 글에서 다루었으니,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