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스에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자주 화제가 됩니다. 지금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국경이 나뉘어 있지만, 러일전쟁 이후에는 사할린에서 육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전신인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이념 면에서 일본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메이지 시대에는 오히려 상호 이해관계가 일치해 중립 조약을 체결한 적도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자주 거론되는 북방영토 문제와 함께 소련-일본 중립조약의 배경과 내용, 그리고 폐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소련-일본 중립조약이란?
소련-일본 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은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중립 조약입니다.
핵심 내용은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불가침 원칙과, 한쪽이 제3국과 교전할 경우 다른 한쪽은 중립을 유지한다는 조항입니다. 유효 기간은 5년으로 정해졌으며, 만기 1년 전까지 어느 쪽도 폐기를 통고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5년씩 연장되는 규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조약은 왜 체결되었을까요?
중립조약이 체결된 배경
1929년 대공황 이후 세계의 삼분화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기점으로 세계는 크게 세 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 미국·영국·프랑스처럼 자국과 식민지에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자본주의 진영
- 식민지와 자원이 부족해 공격적인 해외 팽창에 나선 일본·독일·이탈리아 등 전체주의 진영
- 계획경제 덕분에 대공황의 직접적인 타격을 피한 공산주의 진영(소련)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일본과 독일의 해외 팽창이었습니다. 이미 식민지 지배를 통해 이권을 확보하고 있던 영국·프랑스와 충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고, 미국·영국과의 관계도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일본과 소련의 접근
국제적으로 고립에 몰린 일본은 미국·영국에 맞서기 위해 독일과의 관계를 깊이 다져갔고, 그 흐름 속에서 일·독·이 3국 동맹(삼국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당시 고노에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마쓰오카 요스케는 소련-일본 중립조약 체결 후 이를 발전시켜 소련까지 아우르는 4국 동맹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컨대 '자본주의 vs 전체주의·사회주의'라는 대립 구도를 만들려던 발상입니다.
* 일·독·이 3국 동맹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별도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한편 소련은 처음에는 중립조약 체결에 소극적이었지만, 독일이 곧 소련 침공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태도를 바꾸어 조약 체결에 합의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마쓰오카의 4국 동맹 구상은 무산되었지만, 일소 양국의 이해관계는 일치했고, 결국 1941년 4월 13일 소련-일본 중립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조인되었습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
소련-일본 중립조약에서 양국은 영토 보전과 상호 불가침을 확인하고, 제3국과 교전할 때 중립을 유지하기로 약속했으며, 유효 기간은 5년으로 정했습니다.
군사 동맹이라면 전쟁 시 협력 의무가 따르지만, 중립 조약에는 그런 의무가 없습니다. 다만 '중립'의 해석에 따라 무력 행사와 무관한 경제적 지원 같은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했다는 점이 특징인데, 흥미롭게도 이 조약에는 '중립'의 범위에 대한 명확한 정의조차 없었습니다.
조약 체결 이후 각국의 상황
에도 시대 말부터 전전(戰前)까지 일본의 해외 팽창에는 두 가지 노선이 공존했습니다.
남진 정책으로의 전환
하나는 소련과 정면충돌하는 북진, 다른 하나는 영국·미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와 부딪히는 남진이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육군이 북진을, 해군이 남진을 주장했지만, 소련-일본 중립조약의 체결로 북진의 부담이 줄어들면서 남진 노선이 사실상 확정되었습니다. 석유 등 풍부한 자원이 있는 남방이 매력적이었다는 점도 한몫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 진출이 시작되면서 미국과의 대립은 결정적 국면에 들어섰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으로 향하게 됩니다.
4국 동맹 구상의 좌절
앞서 언급한 4국 동맹 구상은 원래 독일과 소련이 우호적인 관계라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이 동맹이 실현되면 미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면서 구상 자체가 무너졌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이 개시되자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북진으로 노선을 전환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4국 동맹을 추진했던 마쓰오카 요스케 본인이었지만, 당시 내각 안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고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중립조약 덕분에 모스크바를 지켜낸 소련
1939년 소련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1941년 독일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합니다. 예비 전력이 부족했던 소련은 수도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지만, 일본이 북진하지 않는 덕분에 극동 방면의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돌릴 수 있었고, 그 결과 모스크바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이 독일의 패배는 훗날 나치 독일 몰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약의 폐기와 소련의 대일 참전
1945년 2월, 소련의 얄타에서 영국·미국·소련 3개국 정상 회담이 열렸습니다.
얄타 회담
이 회담에서 미국의 대일 본토 상륙 작전을 앞두고 '소련의 대일 참전'이 논의되었습니다. 당시 일본과 소련은 교전 상태가 아니었지만, 미국은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자국의 피해를 줄이려 했습니다.
소련은 참전의 대가로 쿠릴 열도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북방영토 문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얄타 회담 이후 소련은 4월, 일본에 조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통고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은 손을 잡고 제2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전후에는 '냉전'이라 불리는 대립 구도를 만들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일본의 소련 중재 요청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이 있었고, 일본 정부도 강화(和平)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전국 간에는 더 이상 협상의 창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나라의 중재가 필요했습니다.
그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소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얄타 회담의 밀약은 이미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은 시간을 끌며 여유로운 태도로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결국 헛되이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한 후, 소련은 소련-일본 중립조약의 폐기를 선언하고 8월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 한반도 북부, 쿠릴 열도로 진공했습니다. 미국 본토 공습 등으로 이미 지쳐 있던 일본군은 여러 전선에서 필사적으로 분전했지만 결국 패배했습니다.
소련군은 홋카이도 상륙까지 노렸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일본군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이를 저지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소련은 중립조약을 폐기하면서 조약으로서의 역할을 끝내게 됩니다.
포츠담 선언 수락과 종전
소련과의 교전이 시작된 지 일주일 후,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발표하고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내렸습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이유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가 가장 널리 꼽히지만, 소련의 대일 참전 역시 종전을 앞당긴 중요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