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다누마 오키츠구는 에도 막부를 재건하기 위해 어떤 정치 개혁을 시도했을까?

에도 막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추진한 교호 개혁으로 막부 재정은 다소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1732년 발생한 교호 대기근과 이어진 잇키(봉기)와 우치코와시(타격 운동)로 인해 막부는 다시 재정난에 빠지게 됩니다.

다누마 오키츠구의 등장과 막부 개혁

1745년 요시무네가 쇼군에서 물러나고 9대 쇼군 이에시게의 시대가 열렸지만, 이에시게는 언어 장애가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에시게의 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인물은 곁에 시중드는 소신(小姓) 출신의 오오카 타다미츠였다고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쌀 300석 녹봉의 하급 신분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측용인(側用人)으로 승진했고, 나아가 무사시국 이와츠키 번 2만 석의 번주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오오카 타다미츠 본인은 스스로 정치를 주도하는 유형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9대 쇼군 이에시게와 10대 쇼군 이에하루 시대에 노중(老中)으로서 실질적인 정치를 이끈 인물이 바로 다누마 오키츠구입니다.

처음에는 이에시게의 소신이었던 그는 1758년 다이묘로 승격되었고, 10대 쇼군 이에하루의 측용인을 거쳐 1772년에는 노중에 올랐습니다. 1758년부터 1786년까지, 즉 교호 개혁 이후 약 30년간 다누마 오키츠구가 권력을 쥔 시기를 '다누마 시대'라고 부릅니다.

에도 3대 개혁과 비교하면 다소 소극적인 인상을 줄 수 있지만, 막부의 권력 강화와 국가 체제 재편을 지향한 다누마 정책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을 계승한 흐름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실제로 '예산을 미리 편성하고 이를 지킨다'는 관행 등은 교호 개혁이 마련해 놓은 관료제가 발전한 형태입니다.

다누마 오키츠구의 정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상업 중시 정책
  2. 화폐 통일
  3. 토목 공사

상업 중시 정책

상공업자의 카부나카마 결성을 장려하고 영업 독점권을 부여하는 대신, 매년 묘가금(冥加金)이라는 상납금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상업을 중시하는 구상이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재원은 연공, 즉 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쌀값 하락, 물가 폭등, 잇키 등으로 인해 수입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한계를 느낀 다누마 오키츠구는 상인으로부터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상인들의 불만은 컸지만, 이를 조율하기 위해 카부나카마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카부나카마는 술이나 간장처럼 같은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들의 조합과 같은 조직으로, 조합원들로부터 회비를 거둡니다. 회비를 낸 카부나카마에는 영업 독점권을 부여하고, 가입하지 않은 자의 영업 활동은 금지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관료들에게 더 많은 돈을 바치면 영업상 유리한 조건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뇌물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화폐 통일

메이와 5몬메 은(明和五匁銀)과 남료 2주 은(南鐐二朱銀)을 발행해 동서로 나뉘어 있던 서로 다른 화폐를 통합했습니다.

교환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메이와 5몬메 은 60매 ⇒ 금 1량(兩)
  • 남료 2주 은 8매 ⇒ 금 1량(兩)

이를 통해 금화와 은화를 서로 교환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토목 공사

토목 사업으로는 치바현의 인바늪 간척 사업과 홋카이도 에조 지역 개발을 계획했으나, 이상 기후로 인한 폭풍우와 강의 범람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다누마 시대에는 자연재해가 겹쳤고, 1782년에는 전국적인 흉작과 지진 피해, 아사마 산 분화까지 이어졌습니다.

상인의 힘을 끌어들이려는 정책 기조는 농업 중시를 내세운 보수파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카부나카마 제도는 뇌물 관행에 뿌리내리면서 민중의 비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덴메이 대기근으로 약 13만 명이 기근과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1784년에는 다누마의 아들이 에도 성에서 참살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졌고, 이는 다누마의 몰락으로 이어져 다음 간세이 개혁으로 바통을 넘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