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의 대표적인 대외 정책으로 쇄국(鎖國)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과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를 피하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했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요?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이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에도 막부의 대외 정책
에도 시대 초기에는 주인선(朱印船) 무역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류했습니다. 그러나 무역 질서의 붕괴 우려와 국내 기독교 신자 급증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면서, 막부는 1641년 무역을 강력히 제한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쇄국입니다.
이 정책으로 인해 무역 상대는 네덜란드와 중국뿐이 되었고, 접촉 지점도 나가사키로 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접촉 지점은 나가사키 외에도 마쓰마에 번, 쓰시마 번, 사쓰마 번의 무역까지 포함해 모두 네 곳이었다고 합니다.
쇄국 시대의 네 개의 무역 창구
최근에는 이를 '네 개의 창(四つの口)'이라고 부릅니다.
나가사키구치(長崎口): 막부의 직접 통제 아래 청나라와 네덜란드 간의 무역이 이루어진 창구입니다.
쓰시마구치(対馬口): 조선과의 교류 창구입니다. 쓰시마 번주 소씨(宗氏)가 무역의 중개 역할을 담당했으며, 에도 시대에도 이 권한이 계속 인정되어 막부의 대조선 외교를 중계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사쓰마구치(薩摩口): 류큐 왕국을 통한 무역 창구입니다.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정복하여 지배하게 되면서 류큐 경유의 무역이 인정되었습니다.
에조구치(蝦夷口): 아이누와의 교류 창구입니다. 마쓰마에 번주 마쓰마에씨가 에조(홋카이도)에서 북방 무역을 행했으며, 그 권한은 에도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어 마쓰마에 번 수입의 대부분이 북방 무역에 의존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막부 말기에 이르자 각국의 선박이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페리 함대의 내항 이후, 에도 막부는 무역 제한을 하나둘씩 해제하게 됩니다.
에도 막부 대외 정책의 배경
주인선 무역의 시대
에도 시대 초기는 주인선 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에도 시대라고 하면 고립된 시대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초기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바다를 건너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무역하는 진정한 세계적인 시대였습니다.
주인선이란 해외 항해 허가증인 주인장(朱印状)을 지닌 무역선을 말하며,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했습니다. 주인선의 주요 목적지는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지역이었습니다.
동남아시아 각지에는 무역을 돕던 일본인들이 정착한 일본인 거류지(일본町)가 존재했으며, 적어도 에도 시대 초기까지는 세계적 규모의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봉서선 무역의 시대
그즈음부터 주인장의 발급이 특정 다이묘와 유력 상인에게만 점차 한정되었습니다. 따라서 각지의 일부 다이묘나 막부 관료들이 주인장 없이 무허가 무역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1628년에는 스페인 함대가 주인장을 불태우고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주인장 휴대가 금지되었고, 해외 항행자는 노인망사(老念仏)라 불리는 증명서를 소지해야 했으며, 나가사키 봉행소가 발행하는 항해 허가증을 나가사키에서 받도록 의무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봉서(奉書) 휴대가 완전히 의무화되면서 주인선 제도는 소멸하게 됩니다.
이러한 봉서를 지닌 무역선을 봉서선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의 확산
주인선 제도의 붕괴와 별개로, 국내 기독교 신자의 급증도 막부의 커다란 우려거리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전래된 이후 서일본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가 일본 통치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인 바테렌 추방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탄압 정책은 에도 막부에 의해서도 계승됩니다.
1613년에는 전국령이 반포되어 기독교 신앙이 금지되었습니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하면서 기독교 단속은 더욱 강화되었고, 후미에(踏絵), 종문개(宗門改), 데라우케 제도(寺請制度) 등의 대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해외 항해 금지와 외국선 입항 제한
앞서 언급했듯이 에도 시대 초기의 막부는 주인선 무역 체제의 붕괴와 기독교 신자 급증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막부는 1633년 봉서선 외의 해외 항해를 금지하고, 해외에 5년 이상 거주한 자의 귀국을 금지했습니다.
더 나아가 1635년에는 모든 일본인의 해외 항행과 귀국이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이른바 해외 항해 금지령으로, 무허가 귀국자에게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벌이 규정되었습니다. 이로써 일본인은 더 이상 해외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국과의 무역은 일본에 입항하는 외국 선박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반면 동남아시아 각국의 일본인 거류지에 살던 일본인들은 귀국할 수 없게 되어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1639년에는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이 금지되어, 유럽 무역선은 네덜란드 선박만 남게 되었습니다. 1641년에는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이 데지마로 이전됩니다.
이로써 에도 시대의 해외 무역 체제인 쇄국 정책이 확립되었습니다.
명·청의 해금 정책과의 비교
1641년 이후 쇄국이라 불린 일본의 해외 무역 체제는 명·청 시대 대륙의 해외 항해 및 무역을 금지한 정책인 해금 정책(海禁政策)과 비교되곤 합니다.
명나라는 왜구를 단속하기 위해 1371년부터 해금 정책을 시행하여, 이웃 나라와의 무역을 공식적인 조공 무역으로만 한정하고 민간 상선의 입항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밀무역 단속에 실패하고 왜구의 활동이 오히려 활성화되면서 1567년 해금이 해제됩니다.
청나라에서는 남명과 대만의 정세(鄭氏)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천해령(遷界令)이 반포되어 연안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 실시되었으나, 대만 세력이 평정된 후에는 이 정책이 완화되었습니다.
이후 1757년에는 무역항을 광저우 한 곳으로만 제한하는 해금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이 체제는 아편전쟁 이후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에도 시대 말기의 대외 정책
1757년 이후의 상황을 보면, 일본은 네덜란드 및 중국과의 무역항을 나가사키로 한정했고, 이 체제는 페리의 내항으로 붕괴됩니다.
에도 시대 후반기에는 외국 선박이 일본 근해에 자주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막부는 이국선 무일퇴거령(異国船無二払退令)을 발표하여 모든 외국 선박을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외국인이 일본에 상륙할 경우 체포하고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1842년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고, 막부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따라 외국 선박이 내항하면 연료와 식수를 공급하고 돌려보내는 薪炭給与令(신단급여령)으로 정책을 변경했습니다.
그 후 페리가 중국을 경유해 우라가에 도착하자, 1854년 신미조약(가나가와 조약)으로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가 개항되었고,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는 시모다와 하코다테에 더해 가나가와, 나가사키, 니가타, 고베(효고)가 추가로 개항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다른 서양 열강들과도 유사한 조약들을 차례로 체결하게 됩니다.
이처럼 1641년부터 약 200년간 지속되어 온 해외 무역 체제인 쇄국은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