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자키 전투 승리와 기요스 회의의 배경
아케치 미쓰히데를 물리친 하시바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오다 가문 본령의 질서를 회복하며, 명실상부하게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반면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는 주군의 원수를 갚는 데 뒤처졌고, 다키가와 가즈마스 역시 히데요시의 급부상을 견제해야 할 입장에 놓였습니다.
1582년 6월 27일, 오다 가문의 중신들은 기요스 성에 모여 노부나가의 적법한 후계자를 정하는 기요스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기요스 회의의 참석자
기요스에는 차남 오다 노부카쓰와 삼남 오다 노부타카, 그리고 다키가와 가즈마스 등 유력 가신들도 모였지만,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선정하는 회의에 실제로 참석한 것은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 시바타 가쓰이에, 이케다 쓰네오키, 즉 오다 가문의 네 원로 중신(숙로)이었습니다.
당시 오다 가문의 최고 중신은 시바타 가쓰이에였고, 그다음 자리는 니와 나가히데였습니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함께 공을 세운 이케다 쓰네오키조차 네 번째 위치였습니다. 누구나 시바타 가문과 니와 가문이 발언권을 가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노부나가의 원수를 벤 히데요시는 회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습니다.
정리하면, 기요스 회의란 오다 가문의 숙로 네 사람이 모여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한 회의를 가리킵니다.
회의 안건: 후계자 선정과 영지 재분배
이 회의에서는 오다 노부카쓰 혹은 노부타카 중 한 명이 후계자로 거론되었는데, 노부타카가 후계자가 되면 그를 지지하던 시바타 가쓰이에의 세력이 커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추천하지 않고,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의 장남 산보시(三法師)를 후계자로 세우자고 주장했고, 니와 나가히데가 이에 동조하면서 히데요시의 안이 통과됩니다.
또한 노부나가 사후 영지가 재분배되었습니다. 시바타 가쓰이에는 에치젠과 오미 나가하마를, 히데요시는 하리마·야마시로·가와치·탄바를, 니와 나가히데는 와카사와 오미 2군을 받았습니다. 이케다 쓰네오키는 셋쓰 이케다 외에 아리오카, 오사카, 아마가사키, 효고 등 셋쓰·가와치 지역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습니다.
한편 노부나가의 자식들 중 삼남 오다 노부타카는 미노국 전역을, 차남 노부오는 이세와 오와리국을 다스리게 됩니다.
후계자 선정에 대한 또 다른 설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요스 회의의 모습은 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차남 노부오와 삼남 노부타카가 서로 후계를 주장하지 않아, 히데요시와 상의 끝에 노부나가의 손자 산보시 옹립을 결정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당시 노부타카를 밀고자 했던 시바타 가쓰이에는 야마자키 전투의 공으로 지위가 높아진 히데요시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입니다. 시바타 가쓰이에가 삼남 노부타카를 추천하려 했다는 대목 역시 후세의 창작일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는 산보시가 노부나가의 가독(家督)을 계승하기로 결정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기요스 회의는 후계자 산보시(히데노부)를 옹립하고 이를 지원하는 체제를 결정하기 위해 기요스 성에 모인 회의라는 것이 통설적인 견해입니다.
히데요시는 산보시의 후견인이 아니었다
각종 창작물 속 기요스 회의에서는 히데요시가 산보시의 후견인임을 인정받으며 권위를 확립하고 오다 가문의 실권을 쥐게 된다는 식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 후견인은 차남 노부오와 삼남 노부타카였으며, 산보시의 직접적인 보호자는 호리 히데마사였습니다.
회의 후 삼남 노부타카가 산보시를 기후에 머물게 하면서 히데요시와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타카 편에 섰고, 노부타카는 노부카쓰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우며 갈등을 키웁니다. 결국 히데요시는 노부타카와 시바타 가쓰이에와 정면으로 맞서게 됩니다.
오다 가문의 내분과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를 격파한 히데요시는, 이후 오다 가문의 명목상 당주였던 오다 노부카쓰와도 대립하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충돌합니다. 그러나 그 후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에게 복속합니다.
이처럼 히데요시는 산보시의 후견인으로서 오다 가문을 다스린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보시를 당주로 하는 오다 가문이 노부타카와 노부카쓰의 대립으로 스스로 분열하도록 유도하고, 그 어부지리로 실권을 차지하려 한 것이 히데요시의 장기 전략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