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 천황과 사가 천황 시대에는 천황이 귀족들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국정을 직접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의 차남 계통인 후지와라 북가(北家)는 천황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강화하면서 세력을 넓혀 갔다.
후지와라 북가의 대두
당시 후지와라 북가는 후지와라노 후윳츠구(藤原冬嗣)가 사가 천황의 깊은 신임을 얻어 내장두(内蔵頭)에 임명되고,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기반을 다졌다. 후윳츠구의 아들 요시후사(良房)는 842년 조와의 변(承和の変)을 계기로 오토모씨와 다치바나씨의 세력을 배제하며 후지와라 북가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했다.
858년 세이와 천황이 즉위했고, 요시후사는 외조부의 신분으로 866년 오오테몬의 변(応天門の変)으로 기(紀)씨가 몰락한 뒤 황족이 아닌 인물로서는 최초의 섭정(摂政)에 올랐다. 이후 884년 후지와라노 모츠톳사(基経)의 추대로 즉위한 고코 천황 대에 모츠톳사는 관백(関白)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모츠톳사는 우다 천황의 즉위 시 반포된 조서에 대해 항의하며 철회를 요구했고, 결국 천황이 굴복하여 조서를 거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아코의 변(阿衡の変)'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 후지와라씨의 위엄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며, 천황이 사실상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모츠톳사 사후, 후지와라씨를 외척으로 두지 않았던 우다 천황은 섭정과 관백을 두지 않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중용했다. 그러나 다이고 천황이 즉위하자 후지와라씨는 모략을 꾸며 미치자네를 정치 일선에서 축출해 버렸다(쇼타이의 변).
10세기 전반 무라카미 천황이 친정(親政)을 펼친 시대는 '엔기·덴랴쿠의 치세'로 불리며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친정 기간에도 후지와라노 타다히라가 섭정·관백으로서 태정관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무라카미 천황 사후에는 좌대신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가 유배되는 안화의 변(安和の変)을 거치면서 후지와라 북가의 지배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것이 되었고, 섭관 임명이 하나의 관례로 굳어졌다.
섭관정치의 구조
섭정(摂政)은 천황이 어릴 때 그를 대신하여 정무를 수행하는 직책이고, 관백(関白)은 성인이 된 천황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보는 직책이다. 이처럼 섭정과 관백이 임명되어 행정의 최고 자리에서 정치를 주도하던 이 시대의 통치 형태를 '섭관정치'라고 부른다.
한편 섭정과 관백을 배출하는 가문을 섭관가라고 하는데, 후지와라씨는 헤이안 시대 말기까지 막강한 권력을 유지했다. 후지와라씨 내부에서도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지만, 후지와라노 미치나가(道長)의 등장으로 이러한 다툼은 진정되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미치나가는 네 딸을 차례로 황후와 황태자비로 들여 보내며 약 30년에 걸쳐 조정에서 권세를 휘둘렀다. 고이치조(後一条)·고스자쿠(後朱雀)·고레이젠(後冷泉) 천황은 모두 미치나가의 외손자였다. 또한 그의 아들 요리미치(頼通)는 무려 50년에 걸쳐 섭정·관백을 지내며 후지와라씨의 번영을 안정적으로 이어 갔다.
당시 귀족 사회의 혼인 풍습을 보면, 부부는 일반적으로 아내의 부모 집에 함께 살거나 새집을 마련했고, 남편은 처가 아버지의 후원 아래 생활했으며 자녀들은 어머니 쪽에서 양육되었다. 따라서 모계 인맥, 즉 외척 관계가 사회적 지위를 좌우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섭정·관백은 천황의 모계 친척이라는 신분으로 황실에 깊이 접근하여 높은 권위를 바탕으로 막대한 권력을 장악했다. 특히 섭정·관백이 관료 임용권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중하급 귀족들은 섭관가 및 그에 연결된 상급 귀족에게 귀속되었고, 출세의 속도와 한계 역시 가문의 성격과 외척 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정무 운영은 섭정·관백 아래의 태정관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관리에게 명령을 내리고 전국을 다스리는 형태였다. 그런데 점차 선례와 의식을 중시하는 형식적인 운영으로 변해 갔고, 조정에서는 연중행사(年中行事)가 크게 발달했다.
그 결과 지방 정무는 국사(国司)에게 일임되었고, 조정은 국가 정책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게 되었다.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의 동아시아 정세
894년 견당대사로 임명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이미 내전으로 쇠락한 탕(唐)에 대한 사절 파견을 중단할 것을 상주했고, 이로써 견당사는 실제 파견 없이 종결되었다.
907년 동아시아의 중심국이던 탕이 멸망했고, 이윽고 송(宋)이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일본은 송과 적극적인 국교를 맺지는 않았지만, 규슈 하카타를 찾은 송 상인들을 통해 각종 물품이 수입되었고, 승려들이 송으로 건너가는 등 민간 차원의 교류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나라 시대부터 일본과 교류해 온 발해가 요(遼)에 의해 멸망했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신라를 병합하고 반도를 통일했지만, 일본은 이들 국가와도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