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초유명 전국 다이묘들의 아들들은, 너무나 위대한 아버지 덕분에 오히려 과소평가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상당히 유능한 무장이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버지의 강렬한 존재감 속에 묻혀 제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전국 다이묘들의 아들들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시겐 이상으로 강력했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1546~1582)
다케다 가쓰요리는 다케다 시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시겐의 적장자였던 요시노부가 폐적되면서, 가쓰요리가 명문 다케다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겐의 영토를 물려받은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나가시노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이 전투는 다케다 가문 멸망의 발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쓰요리는 종종 아버지 시겐과 정반대 방향으로 평가받곤 합니다.
용맹한 무장이었던 다케다 가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음을 각오할 정도였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바로 가쓰요리의 맹공격이 도쿠가와 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가쓰요리는 남다르게 용맹한 젊은 무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첫 출진에서 보여준 과감한 돌격은 가신들의 극찬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 시겐도 함락하지 못한 성을 함락시키다
다카텐진성(高天神城)은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에 위치한 산성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다케다 가쓰요리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아버지 시겐조차 함락시키지 못했던 이 성을, 가쓰요리는 마침내 함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공적으로 인해 영토는 시겐 사후 최대치로 확장되었고, 가이, 시나노, 스루가, 고즈케, 미카와, 미노 일부를 보유하며 노부나가에 이은 전국 제2의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주변에는 적이 많았고, 백성과 가신들의 반발, 그리고 오다·도쿠가와·호조라는 거대 세력의 압박 속에서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나가시노 전투 이전까지 그런 세력을 키워낸 사실만 놓고 보면, 그가 어리석은 장군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버지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은 유능한 후계자, 오다 노부타다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1555~1582)
천하에 이름을 떨친 오다 노부나가의 적장자로 태어난 노부타다는, 노부나가 생전에 가독을 물려받아 정당한 후계자로서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아버지를 보좌했습니다.
과거에는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 비교되며 어리석은 장군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노부타다는 노부나가 본인이 인정할 만큼 매우 뛰어난 후계자였습니다.
전공을 살펴보면, 나가시노 전투와 이와쓰키성 공략 등에서 활약했으며, 미노를 맡겨진 뒤 기후성의 성주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지위는 아케치 미쓰히데나 하시바 히데요시와 동격 또는 그 이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단 두 달 만에 멸망시켰고, 전국 최강이라 불리던 다케다 가문 역시 20대 젊은 무장의 손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그 역시 혼노지의 변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혼노지 인근 묘카쿠지에 머물러 있던 노부타다는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도중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이후 소수의 병력으로 아케치 군에 맞서 싸웠으나 소용없었고, 니조 어소에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오다 노부타다가 살아남았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두려워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1593~1615)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측실 요도도노 사이에서 태어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하게 됩니다.
요도도노에게 붙어 자란 모자 연애 이미지가 강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지만, 실제로는 겁 없는 무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히데요시 말년에 태어나 극단적인 과보호 속에 자란 것은 분명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배웠고 총명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남아 있는 사료에 따르면 히데요리는 몸집이 크고 위풍당당했으며, 키 197cm에 몸무게 160kg에 달하는 거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히데요리의 서예 실력이 뛰어나 여러 다이묘들이 그의 글씨를 탐내며 구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위엄을 유지하던 도요토미 가문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으로 나뉘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가문이 쇠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여전히 오사카성에 있었고, 도쿠가와 가문을 능가하는 권위와 위엄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전후 이에야스로부터 셋쓰·가와치·이즈미의 다이묘 지위를 받긴 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주로 서일본을 중심으로 한 내정 간섭과 직할령 수입의 흔적이 확인되어, 여전히 상당한 위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가문이 도쿠가와 가문보다 아래로 밀려난 듯한 이미지가 있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고 실제로는 양가가 대등한 관계였습니다.
막부 성립 이후에도 도요토미 가문의 세력이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히데요리가 성년이 되면 간파쿠 직위를 회복하고 도요토미 가문이 다시 부흥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자신 사후에도 도쿠가와의 천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오사카의 진을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케마리 명수 이마가와 우지자네, 사실은 만능 재주꾼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 1538~1615)
'동해 제일의 궁수'라 불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로 태어난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전성기를 누리던 이마가와 가문을 자신의 대에 멸망시키면서, 지금은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문무를 겸비한 무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케마리의 명수였던 그는, 무려 노부나가에게 지도를 청할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 전해집니다. 적이었던 노부나가조차 인정했을 만큼 뛰어난 솜씨였던 것이죠.
또한 우지자네는 평생 수많은 와카를 읊었는데, 그중 1658수의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그의 와카는 고미즈노오 천황의 선집에 오르기도 했다고 하니, 당대 최고 수준의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무예에 대한 조예도 깊어, 검술은 쓰카하라 보쿠덴에게 사사하며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쓰카하라 보쿠덴은 가시마신토류의 개조로, 쇼군과 다이묘에게까지 검술을 가르쳤던 달인이었습니다. 이런 검성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의 실력 역시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게다가 영지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전국시대를 무사히 통과하여, 쇼군가에서 고케(高家)라는 명문 집안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가문을 끝까지 지켜낸 공적은 컸으며, 에도 시대까지 가명이 이어졌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고케의 지위를 받은 이마가와 가문은 메이지 시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