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헤하자마 전투 직전의 세력 판도를 보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스루가·토토미·미카와를 지배하고, 간토의 호조 씨, 가이의 다케다 씨, 미노·오와리의 오다 씨 등 강대한 세력에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이들을 견제하며 도카이도의 요충지를 장악한 다이묘였습니다.
호조 씨·다케다 씨와의 삼각 동맹(불가침 조약) 역시 이마가와 요시모토에 의해 실현된 것입니다.
당시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천하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내에서는 검지(檢地)를 실시하고, 아버지 우지치카가 제정한 법령을 증보하는 등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마가와 씨의 전성기를 이룬 요시모토였지만,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마가와 가문의 정책에는 거의 항상 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승려의 몸으로 이마가와 가문을 지탱했던 오하라 세사이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전국시대 승려의 역할
당시 승려들의 역할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유학에도 밝은 지식인이었던 승려는 다이묘의 교육자로서 덕망 수양과 덕정(德政)을 가르쳤습니다. 교재로는 병법서로 알려진 중국 고전인 『육도(六六韜)』『삼략(三略)』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출진 날짜를 정하거나 전승을 기원하는 등의 주술적 역할도 맡았습니다. 이러한 역할은 작전이나 계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전쟁에 기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이묘 사이의 각종 교섭에서도 승려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교섭은 일본 국내에 머물지 않고, 언어 능력을 살려 중국과 한반도까지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유명한 다이묘 가문의 승려로는 다케다 신겐의 카이센 조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관련된 난코보 텐카이, 모리 데루모토의 안코쿠지 에케이 등이 대표적입니다.
* 카이센 조키는 “마음이 타올라 없어지면 불길 또한 시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승려들은 전국 다이묘의 두뇌가 되어 배후에서 다이묘를 지탱했습니다. 오하라 세사이 역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두뇌로서 이마가와 가문을 떠받친 인물입니다.
오하라 세사이 연표
1496년 스루가에서 태어남
1525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불문에 들어감, 오하라 세사이가 그의 교육 담당이 됨
1526년 이마가와 우지치카 사망
1537년 가이의 다케다 노부토라와의 관계 개선에 힘씀
1545년 순푸에 린자이지 창건
1546년 다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 받는 조건으로 마츠다이라 가문 지원
1549년 오다 가문에 넘어간 인질 다케치요 마츠다이라(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회복, ‘이마가와 가나 목록’ 33개조 증보에 기여
세사이는 이마가와 가문의 발전에 공헌하는 한편, 승려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오하라 세사이의 생애
출생과 배경
오하라 세사이는 스루가의 이하라 성(井原城)에서 아베 마사모리(安部正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수군(水軍)을 이끌던 오키츠 씨(興津氏)의 딸이라고 전해집니다.
두 집안 모두 대대로 이마가와 씨를 섬겨 온 후다이(譜代) 중신이었습니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세사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여러 사찰에서 학업과 수행을 받았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만남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만남은 그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522년, 오하라 세사이는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다섯째 아들 요시모토의 교육 담당으로 위탁됩니다.
다섯째 아들이었던 요시모토는 가독 상속과는 인연이 없는 몸이라 여겨져, 다른 집안의 양자로 가거나 출가하는 길을 걷게 되었고, 결국 불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오하라 세사이와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이에는 부자(父子)와도 같은 관계가 형성되었고, 두 사람은 함께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세사이는 교토에 올라가 사찰에서 학문을 닦고 공경(公家)들과 깊은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전국무장이면서도 그 문화를 흡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세사이는 요시모토에게 무예도 가르쳤습니다.
이 무렵 그는 요시모토의 교육자일 뿐만 아니라 이마가와 씨의 가신으로 정식 출근해 달라는 청도 받았지만, 두 번이나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끝내 당주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오하라 세사이가 그만큼 재능 있는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화창의 난(花倉の乱)과 가독 계승
이마가와 우지치카가 사망하고 우지테루가 가독을 계승했으나,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합니다.
같은 시기에 차남 히코고로도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우지테루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독을 둘러싼 후계 분쟁이 일어났고, 가문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시모토와 세사이는 이 ‘화창의 난’을 불과 2주 만에 진압합니다.
세사이의 무공은 공식적으로 남은 기록이 없지만, 다케다 가문이 남긴 사료에는 “오하라 세사이 없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는 기술이 있어, 그가 어떤 식으로든 깊이 관여했음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 화창의 난이라는 소동 속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환속(還俗)하여 이마가와 가문으로 돌아왔고, 오하라 세사이를 중신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시모토의 두뇌로서의 활약
가독을 계승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오른팔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오하라 세사이는, 이마가와 씨와 다케다 씨의 혼인, 그리고 다케다 씨와 호조 씨의 혼인을 성사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더 나아가 미카와 평정 과정에서 영내 무사들에게 영지를 안정시켜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어, 그가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다 노부히데에게 빼앗겼던 다케치요 마츠다이라(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되찾는 데 성공했으며, 그의 교육 담당도 겸했다고 전해집니다.
내정 면에서도 이마가와 가문 영지의 법률을 규정한 ‘이마가와 가나 목록’의 증보에 관여했고, 사찰과 신사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등 승려와 무장의 양면에서 활약했습니다.
승려로서의 오하라 세사이의 업적
이마가와 씨의 전성기를 지탱했던 오하라 세사이는 승려로서도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1545년, 고승을 초빙하여 순푸에 린자이지(臨済寺)를 창건하고 스스로는 제2대 주지가 되었습니다. 이어 1550년에는 교토 묘신지(妙心寺)의 제35대 주지가 되며 승려로서도 성공을 거듭했습니다. 이 시기에 많은 사찰이 세워졌고 묘신지 파가 크게 유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마가와 가문의 전성기를 떠받친 오하라 세사이는 오헤하자마 전투 5년 전인 155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명한 군사 야마모토 간스케도 이마가와 가문에서 세사이를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요시모토는 세사이와 의논하여 두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원로들의 권위는 작으며, 만약 세사이가 죽으면 국정이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평가에서 알 수 있듯, 세사이 없이는 존립할 수 없었던 이마가와 씨는 오헤하자마 전투를 계기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