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배신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은 하극상이 드물지 않던 전국시대에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신 행위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지금까지도 다양한 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당대 권력자들의 시각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겨진 문헌이 모두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혼노지의 변 당일 아케치 미츠히데가 과연 현장에 있었는지, 그리고 진짜 범인은 누구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혼노지 진군 경로
2007년 NHK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에 따르면, 아케치 미츠히데는 탄바 국 이조·카메야마 성(亀山城)에서 출발해 옛 사카토게 고개를 넘고 교토에 입성한 뒤, 가쓰라 강(桂川)을 건너 혼노지(本能寺)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되는 정설입니다.
이 경로를 따르면 카메야마 성에서 혼노지까지의 거리는 약 20km입니다.
미츠히데는 6월 1일 밤 8시에 카메야마 성을 출발했고, 혼노지의 변은 6월 2일 새벽 2시에 발생했습니다. 즉, 병사들은 단 6시간 만에 약 20km를 행군해야 했던 셈입니다.
당시의 환경을 고려하면 이 20km 행군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30kg 무게의 갑옷과 험로
당시 토세이구스쿠(当世具足)라 불린 갑옷은 신식 무기인 총포에 대비하기 위해 철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무게는 약 30kg에 달했습니다.
이런 장비를 착용한 상태에서 보병 3~4명이 나란히 서서 좁고 가파른 옛 고개를 하나씩 오르고, 말들은 세로 줄지어 통과해야 했습니다. 교토에 입성한 후에는 가쓰라 강을 건너야 하는데, 말을 타거나 도보로 강을 건너거나 상류의 먼 다리를 우회해야 했습니다.
6시간이라는 정해진 시간을 고려하면, 다리를 우회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말을 타거나 도보로 강을 건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가(公家) 야마시나 곤교(山科言経)의 일기에 따르면 6월 1일 전날부터 비가 내려 가쓰라 강이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말을 타든 도보든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멀리 떨어진 다리를 우회해야만 했다면, 6시간 안에 혼노지에 도착하려면 시속 3~4km의 속도로 행군해야 합니다.
참고로 시속 3km는 대화를 즐기며 천천히 걷는 속도이고,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걷는 직장인의 속도가 약 시속 5km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체력을 알 수 없지만, 비에 젖어 진흙탕이 된 옛 고개와 체력이 좋지 않은 보병들을 감안하면 빠르게 돌파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대의 상식을 적용해 보더라도 수만 명의 병사가 30kg의 짐을 지고 험로에서 시속 3km 이상을 유지하며 6시간 만에 20km를 주파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혼노지에서 노부나가가 습격당했을 때 아케치 미츠히데는 현장에 없었다?
이러한 검토 결과에 따르면,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습격당했을 때 아케치 미츠히데는 현장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사살된 것은 사실이므로, 아케치 미츠히데 이외의 누군가가 노부나가를 죽였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주목받는 것이 바로 예수회 흑막설입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부나가는 변소에서 나와 손을 씻고 있는데 등 뒤에서 활과 화살로 공격을 받았다. 노부나가는 소동(小姓)을 부르고 나기나타를 휘두르며 응전했지만, 철포대가 발사한 탄환은 왼쪽 어깨에 명중했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장지문을 닫고 불을 지펴 자결했다."
이처럼 생생하고 상세한 묘사는 마치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1만 명이 넘는 병사(2~3만 명이라는 설도 있습니다)가 움직이는 와중에 당사자가 아니면 이런 디테일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예수회는 왜 노부나가를 죽였는가?
노부나가는 예수회에게 선교 활동을 허가했고, 스스로 남만풍 망토를 입는 등 예수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회가 노부나가를 죽였을까요?
노부나가가 예수회의 분노를 산 이유는 프로이스의 기록에 "노부나가가 지나치게 오만하여 세상의 창조주 데우스(Deus)만이 받아야 할 것을 빼앗았으므로, 그 영혼은 지옥에 묻힐 것이다"라고 남아 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만함'이란, 아즈치 성 터에 남은 능선 위에 '본산(梵山)'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노부나가가 "이 돌이 곧 신이다"라며 천황과 신을 넘어 자신이 유일한 신이라 칭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회에게 신은 오직 데우스뿐이므로, 노부나가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계 종교전쟁의 역사를 돌아보면, 자신의 종교에 모셔진 신을 부정하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혼노지는 북쪽 록카쿠도리(六角通), 동쪽 니시노토인도리(西洞院通), 남쪽 다코야쿠시도리(蛸薬師通), 서쪽 아부라노코지도리(油小路通)에 둘러싸인 한 변 120m의 정방형 부지였다고 전해지지만, 노부나가는 북동쪽 구석의 작은 건물에 머물렀습니다. 즉, 절이라기보다는 저택에 가까운 구조였습니다.
혼노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부나가와 측근들의 물건이 있다 해도 최대 40명 정도만 수용 가능한 규모로 밝혀졌습니다. 이 결과로 볼 때, 지금까지 말해온 100명 규모라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덧붙여 예수회는 남만무역을 통해 화약의 원료인 초석을 거래하며 충분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고, 활·화살·총과 같은 무기를 조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회의 본산인 남만사(南蛮寺)가 혼노지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있다는 점도 이 설의 근거가 됩니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직접 노부나가를 죽이지 않았다
미츠히데의 늦은 도착이 사실이라면, 혼노지에서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미츠히데 이외의 인물이 됩니다.
지금까지 예수회를 살펴봤지만, 다른 가능성도 탐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케치 미츠히데 군은 혼노지를 공격한 후 니조 어소(二条御所)에 머물던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를 공격해 죽였습니다. 이 묘사는 프로이스의 '일본사(日本史)'에 근거하며, 공가 카슈지 하루토요(勧修寺晴豊)가 미츠히데의 가신 이노우에와 대화했다는 증언도 있어, 니조 성 공격은 미츠히데가 지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다 노부타다 공격의 사실을 고려하면, 미츠히데가 단순히 혼노지에 들렀다가 돌아간 것이 아니라 명백히 적대감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케치 미츠히데의 병사가 카메야마 성을 떠나 혼노지에서 학살을 벌였다는 증언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병사가 미츠히데 본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별동대가 먼저 노부나가를 습격하고, 그 후에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에 도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미츠히데 본인은 조정의 사자 요시다 가네미(吉田兼見)에게 이 반역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으므로, 아케치 미츠히데가 명백히 적의를 품고 노부나가를 향해 진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헌 기술들로 미루어 볼 때, 아케치 미츠히데는 별동대를 혼노지에 파견해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뒤, 미츠히데 본인이 도착하여 직접 지휘하며 니조 성의 노부타다를 공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노부나가가 살해된 것은 분명하지만, 가해자는 미츠히데 본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마무리하며
혼노지의 변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정황 증거에 기반한 주장이 있을 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설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죽였다는 역사로 정착했지만, 설령 미츠히데가 반역하지 않았다 해도 누군가는 노부나가를 노리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노부나가는 다른 다이묘 가문, 가신들, 조정에 대해 많은 불신을 품고 있었고,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