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5000엔 지폐의 역사] 지폐 속 얼굴, 성덕태자부터 '태평양의 다리' 니토베 이나조까지!

[5000엔 지폐의 역사] 지폐 속 얼굴, 성덕태자부터  태평양의 다리  니토베 이나조까지!

2024년, 일본 지폐가 새로운 초상으로 교체됩니다.

일본에서는 약 20년 주기로 지폐 도안이 바뀌어 왔습니다. 이번에는 세 종류의 지폐 가운데서도 일상에서 접할 기회가 드문 '5,000엔권'의 초상 인물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5000엔권을 볼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한 번 쓰면 끝인 경우도 많아, "이 사람이 대체 누구지?"라고 궁금해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5000엔권의 초상으로 선정된 위인들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지폐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 성덕태자!

[5000엔 지폐의 역사] 지폐 속 얼굴, 성덕태자부터  태평양의 다리  니토베 이나조까지!

1957년 10월 1일 발행된 최초의 5000엔권 초상은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성덕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2개월 뒤 발행된 만엔권의 초상 역시 성덕태자였습니다.

참고로 1950년부터 발행된 두 번째 시리즈의 천엔권에도 성덕태자가 사용되었으며, 백엔권 역시 1930년 발행된 네 번째 시리즈부터 1956년 지급이 정지된 일곱 번째 시리즈까지 줄곧 성덕태자가 등장했습니다.

현대에는 다소 옅어졌지만, 당시에는 "지폐 = 성덕태자"라는 이미지가 매우 컸습니다. 그가 일본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된 배경이기도 할 것입니다.

'태평양의 다리', 국제연맹 사무차장 니토베 이나조!

[5000엔 지폐의 역사] 지폐 속 얼굴, 성덕태자부터  태평양의 다리  니토베 이나조까지!

1984년 11월 1일부터 약 20년간 5000엔권의 초상을 장식한 인물은 니토베 이나조였습니다.

당시 여성을 초상으로 선정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무라사키 시키부와 세이 쇼나곤은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았고, 요사노 아키코는 반전 가요를 지었으며, 히구치 이치요는 요절했다는 이유로 여성 교육에 평생을 헌신한 니토베 이나조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무라사키 시키부는 2000년 발행된 2000엔권에, 히구치 이치요는 그다음 5000엔권에 각각 사용되었습니다.

니토베 이나조는 어떤 인물일까?

1862년, 지금의 이와테현에 해당하는 무츠국에서 모리오카번의 번사였던 아버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에도 시대 중기의 일입니다.

이나조의 증조부·조부·아버지는 모두 뛰어난 인재였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공부하게 됩니다. 신와타토 집안에는 서양의 물건들이 많아 동경심을 키우기에도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한때 메이지 천황이 행차하여 신와타토 가문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때 "조상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업에 힘쓰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천황이 한 집안을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그 가문의 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0세 무렵 영어 공부를 위해 상경했고, 13세 무렵에는 새로 개교한 도쿄 영어학교(도쿄대학의 전신 중 하나)에 입학했습니다.

15세 때, 천황의 말씀을 계기로 걷기 시작한 농업의 길을 추구하기 위해 당시 학사 학위를 수여하던 몇 안 되는 교육기관이자 현재의 홋카이도대학인 삿포로 농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사 학위란 대학 졸업자에게 주어지는 학위입니다.

삿포로 농학교 창립 당시 "소년이여, 대망을 품어라"라는 말로 유명한 클라크 박사가 부학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아쉽게도 이나조가 재학하던 시기와는 시기가 어긋나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1학년 대부분은 클라크 박사의 성경 수업을 통해 기독교에 입교했고, 2학년들도 그 영향을 받아 입교했습니다.

이나조 역시 세례를 받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받으며 기독교에 깊이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다툼이 생기면 열을 내 싸움이 난장판이 되곤 했던 그가, "그리스도는 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성경을 읽어라."라고 말할 정도로 크게 변모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교수직과 교장직을 거쳐 국제연맹 사무차장까지!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한 후 홋카이도청에서 메뚜기 연구를 진행했고, 이후 제국대학에 진학했지만 연구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중퇴합니다.

23세 무렵, "태평양의 다리가 되겠다"는 목표를 품고 미국의 대학에 유학을 떠납니다. 이 무렵 훗날 아내가 되는 메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 모교인 삿포로 농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독일 유학 중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30세 무렵, 독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국에서 메리와 결혼했고, 귀국 후 삿포로 농학교 교수로 부임합니다. 이 무렵 명예 학사 학위도 받게 됩니다.

첫째 아이를 잃고 병을 얻은 이나조는 캘리포니아에서 요양하며 『무사도(Bushido)』를 영어로 저술했고, 이 책은 이후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마저 감동시켰다고 전해집니다.

42세 무렵, 삿포로 농학교를 사임하고 대만총독부의 기사(技師)로 임명되었으며, 교토제국대학 법과대학 교수를 겸임하며 법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47세 무렵에는 제1고등학교 교장을 맡는 동시에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교수도 겸임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일본은 연합국 측에서 승리하지만 이러한 비극적 충돌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 탄생합니다.

60세 무렵 이나조는 일본 대표 국제연맹 사무차장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습니다.

7년간 근무한 사무차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도쿄여자경제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고, 이 무렵 명예교수 칭호를 받습니다.

만년에는 국제사회에서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이던 일본의 이미지 개선에 힘썼지만, 정작 국내외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한 바로 그해, 캐나다에서 쓰러져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72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태평양의 다리'라는 이름처럼 평생을 그 사명을 향해 달려온 인생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큰 전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