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말기 격동기] 사쓰마번의 선택이 조슈번과 아이즈번의 운명을 가른 순간들](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209265747.jpg)
에도 시대 일본에서 각 번(藩)은 마치 하나의 독립국처럼 저마다 고유한 노선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는 '개국', '존왕양이' 등 입장 차이로 인해 번주들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외세를 물리치자!"라는 극단적 노선을 걷던 조슈번, "우리 번은 막부를 위해 존재한다"는 아이즈번, 그리고 어느 진영에 서느냐에 따라 미래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진 사쓰마번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아이즈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교토 슈고직'에 임명되다!
페리 내항 이후 일본은 막부 말기에 접어들었고, 외세에 대한 약한 막부의 태도에 분노한 급진적 낭인들이 교토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낭인들에 의한 막부 요인의 암살, 상인들을 상대로 한 강도 행위 등 교토의 치안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이에 막부는 아이즈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를 교토 슈고직(京都守護職)에 임명했습니다.
거대한 역할을 맡게 되어 기뻐했을 것 같지만, 정반대였습니다. 가타모리와 그의 가신들은 임명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아이즈번의 재정은 이미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교토를 지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즈번은 막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가훈이 거론되면서, 결국 마지못해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즈번은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한탄하는 가신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맡을 수 없는 중책이라는 위상이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게다가 이 책임 때문에 '아이즈 전쟁'이라는 비극이 초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몰락에서 반격으로, 조슈번의 귀환!
신센구미, 아이즈번 관리 하에 배속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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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호위를 위해 에도에서 결성된 '로시구미(浪士組)'에는 곤도 이사미(近藤勇)와 히지카타 도시조(土方歳三) 등 많은 인물이 속해 있었습니다.
가타모리는 곤도 일행을 '아이즈번 예속'으로 삼았고, 이들이 후에 '신센구미(新選組)'로 이름을 알리며 교토의 치안 유지에 크게 활용됩니다.
8월 18일의 정변!
1863년 5월,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외국 선박 포격'을 감행합니다.
이것은 외세를 타격하겠다는 '양이(攘夷)' 결행의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호응하는 번은 없었고, 오히려 조슈번의 행동은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결국 조정의 허가를 받은 아이즈·사쓰마 두 번이 주도하여 조슈번을 교토에서 추방했고, 조슈번주는 파면됩니다.
이 사건은 1863년 8월 18일에 일어났기에 '8월 18일의 정변'이라 불립니다. 기억하기도 쉬운 사건이죠.
이케다야 사건!
"기온 축제 전 바람 부는 날, 교토 어궁에 불을 질러 그 혼란을 틈타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을 유폐하고,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 다이묘들을 암살한 뒤, 천황을 조슈로 옮긴다."
이것이 바로 조슈번의 음모였습니다.
이를 사전에 파악한 신센구미가 아이즈번 관리 하에, 이케다야에서 회합 중이던 조슈번 무사 등을 습격해 체포하는 데 성공한 사건이 바로 이케다야 사건입니다.
신센구미의 이름을 천하에 알린 사건이기도 합니다.
조슈번의 인재들이 이케다야에서 크게 줄었기에, 메이지 유신이 1년 늦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금문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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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야 사건 한 달 후, 조슈번은 "천황께 조슈번주의 누명을 호소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합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도전한 조슈번은 아이즈·사쓰마 번이 이끄는 막부군에게 또다시 패배합니다.
교토에서의 전투에서 조슈번이 어궁을 향해 발포한 사실은 단순한 누명 호소를 넘어, 조정으로부터 추토령(追討令)까지 받게 만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조슈번은 조정과 적대하는 '조적(朝敵)'로 규정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조슈번의 아이즈·사쓰마 번에 대한 원한은 갈수록 깊어져 갔습니다.
제1차 조슈 정벌!
금문의 변 불과 2일 만에, 조정은 막부에 '조슈 정벌'을 명합니다.
조슈 정벌의 참모를 맡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는 '조슈번주의 사죄, 조슈 가로 3명의 할복, 야마구치 성 파괴' 등의 조건을 제시해, 싸우지 않고 조슈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 무렵 사이고는 막부의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만나 막부를 대체할 새 정권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후에 '에도성 무혈 개성'에도 함께 관여하게 됩니다.
사쓰추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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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인물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바로 사이가 나빴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사이의 동맹을 성사시킨 장본인입니다.
사쓰마번은 아이즈번과 함께 막부 측에 섰지만, '사쓰에이 전쟁(薩英戦争)'을 계기로 영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막부를 타도하고 새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자는 방침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사쓰마번 혼자서 막부 타도를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조슈번은 조적으로 지목되어 무기 구매마저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 동맹이 성립되면 사쓰마의 명의로 무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사쓰추 동맹(薩長同盟)'이 성립됩니다.
물론 양번은 서로 원수지간이었고, 자존심이 동맹 성사를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그 벽을 허문 것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의 탁월한 중재술이었습니다.
제2차 조슈 정벌!
조슈번은 사쓰추 동맹을 통한 무기 보강으로 기세를 만회하려 합니다.
막부는 다시 한번 조정의 허가를 받아 조슈로 진군합니다.
그러나 사쓰마번은 동맹에 따라 출병을 거부했고, 조슈번은 사쓰마번을 경유해 영국산 최신형 군함과 무기를 대량 구입하여 15만 막부군을 연이어 격퇴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조슈 정벌 도중, 에도 막부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가 사망합니다.
막부는 휴전을 선언하고 철수합니다. 사실상 막부의 대패였으며, 이 전투가 막부 쇠퇴의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아이즈번마저 '조적'이 되다!?
'대정봉환'과 '왕정복고'!
조슈 정벌에 실패한 막부,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고메이 천황(孝明天皇)마저 붕어합니다.
이로 인해 조정과 막부의 유대를 강화하려던 '공무합체(公武合体)' 노선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제15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정치를 막부에서 조정으로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하고, 두 달 후 새 정부가 수립되며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포되어 에도 막부는 완전히 폐지됩니다.
보신 전쟁의 시작!
아이즈번은 새 정부군인 사쓰마번·조슈번과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구 막부군은 조정에 대항한 '조적'이 되었고, 이번에는 아이즈번이 조적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도바·후시미에서 패한 구 막부군은 에도로 패주했고, 아이즈번은 보신 전쟁 최대의 비극으로 꼽히는 '아이즈 전쟁'으로 향하게 됩니다.
정리
이번 글에서는 에도 시대 말기의 아이즈번, 조슈번, 사쓰마번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같은 일본 안에서도 번이 다르면 마치 다른 나라처럼, 사상과 노선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막부 타도를 외치던 조슈번, 막부를 위해 싸우던 아이즈번, 그리고 막부를 타도하되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일을 풀어가던 사쓰마번.
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추적해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진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