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번치현(廢藩置縣)’이라는 네 글자 용어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다'는 뜻입니다.
폐번치현은 메이지 시대 정부가 실시한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로, 이번 글에서는 어떤 의도로 그리고 왜 실시되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애초에 '번'이라는 말이 없었다?
![[폐번치현] 메이지 시대에 실시된 주요 정책! 처음에는 현이 무려 302개?](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209275205.jpg)
현재는 사쓰마 번, 조슈 번처럼 보통 '번'이라는 단어를 붙여 부르지만, 에도 시대에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번', 그 영주인 '번주', 가신인 '번사' 같은 말은 모두 근대에 만들어진 역사 용어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이라고 불렀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참고로 '막부'라는 단어도 에도 시대 후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라는 표현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폐번치현이 실시된 이유!
![[폐번치현] 메이지 시대에 실시된 주요 정책! 처음에는 현이 무려 302개?](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209275389.jpg)
판적봉환(版籍奉還)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에도 막부는 소멸하고 정권은 천황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이어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통해 새로운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었고,
무진전쟁(戊辰戦争)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하면서 일본 전토가 새 정부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에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은 여전히 다이묘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더 이상 쇄국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국문을 열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일된 국가 체제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각 다이묘의 영지인 '판(版)'과 인구 장부인 '적(籍)'을 천황에게 반환하게 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토지와 백성이 모두 천황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메이지 2년(1869년)의 판적봉환(版籍奉還)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이묘의 명칭이 '번지사(知藩事)'로 바뀌었을 뿐 각 영지의 통치자는 그대로였습니다.
에도 시대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던 셈입니다.
참고로 '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폐번치현
'부(府)'와 '현(県)'이 새 정부의 직할지가 되었지만, 그 면적은 전국의 약 4분의 1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번'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부번현삼치제(府藩県三治制)라고 부릅니다.
중앙 정부는 부와 현에는 '부지사'와 '현령'을 파견했지만, 번에는 구 다이묘인 '번지사'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하나로 통합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이지 4년(1871년), 메이지 정부는 도쿄 황거에 각 번의 번지사들을 소집해 폐번치현을 명령했습니다.
이로써 번은 소멸했고 번지사들도 직위를 잃었습니다.
다만 구 번주들은 대신 화족(華族)이라는 귀족 계급으로 편입되어 예우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번'이라는 제도가 존재했던 기간은 겨우 2년 남짓이었다고 합니다.
부와 현은 몇 개나 되었을까?
처음에는 기존의 번을 그대로 현으로 바꾼 것이었기 때문에 무려 '3부 302현'이나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다른 지역에 떨어진 월경지가 많고 통합성이 약해 매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부터 통합이 진행되어 69현, 60현, 59현, 35현으로 차례차례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행정 구역 하나하나가 너무 넓어지는 문제가 생겨, 메이지 22년(1889년)에 재조정이 이루어지며 현재의 '3부 43현' 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폐번치현의 문제점!
![[폐번치현] 메이지 시대에 실시된 주요 정책! 처음에는 현이 무려 302개?](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209275302.jpg)
폐번치현은 헤이안 시대 이래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영주의 영지 통치 방식을 바꾼 정책으로, 메이지 유신 최대의 개혁이라고 평가받습니다.
그만큼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 번이 지고 있던 모든 부채가 새 정부의 책임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각 번은 이미 에도 시대 중반부터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막말의 흑선 내항과 무진전쟁 출병으로 번 재정은 파탄 직전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폐번치현 이전에도 스스로 판적을 반납하는 번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오사카 상인들에게 '다이묘 어용(大名御用)'이라는 명목으로 빚을 진 번도 많았지만, 결국 이 빚이 돌려받지 못하는 부실 채권이 되면서 상인들이 파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상인이 많았던 오사카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일본 경제의 중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