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혁명(1910)은 멕시코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로, 반정부 세력·농민·원주민들이 주축이 된 자유주의적이며 민중적인 성격의 혁명이었습니다.
이 혁명에는 사회주의·자유주의·아나키즘 계열 지도자들도 참여하여 토지개혁, 북미 다국적 기업의 국유화, 선거제 개혁을 위해 함께 싸웠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역사적 배경
1876년부터 1911년까지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1830~1915)는 후원 정치와 일련의 선거 부정을 통해 멕시코에서 군사 독재를 유지했습니다.
마지막 선거는 1910년에 치러졌으며, 디아스가 또다시 재선에 성공하면서 국내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 반발 여론이 커졌습니다.
한편 1907년 경제 위기로 서민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또한 1893~1902년에 시행된 이른바 '공유지법'은 무주지로 규정된 토지를 몰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주민의 소유지를 대지주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넘기는 결과를 낳았고, 토지의 소수 집중을 부추겼습니다.
결국 1910년, 부정선거에서 패배한 대통령 후보 프란시스코 이그나시오 마데로(Francisco Ignacio Madero, 1873~1913)가 정부에 맞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마데로는 토지개혁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와 판초 비야(Pancho Villa)의 혁명군의 지원을 받아 1911년 10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데로가 토지개혁 공약을 이행하지 않자 사파타는 그와 결별하고 남부로 돌아가 '아얄라 계획(Plan de Ayala)'을 선포하며 토지의 3분의 1을 농민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혁명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된 사파타와 판초 비야는 마데로 정부에 대해 새로운 군사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 장군이 이끄는 보수 세력도 대통령에 반대했습니다. 우에르타는 1913년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프란시스코 I. 마데로 대통령과 부통령을 암살한 뒤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우에르타 정권 역시 무장 봉기에 시달렸습니다. 북부의 주지사였던 카란사(Carranza)는 남부의 사파타와 손잡고 그를 타도했으며, 미국 해병대가 베라크루스 항을 점령하는 등 미국의 지원도 받았습니다.
우에르타는 1914년 6월 판초 비야와 사파타가 정부궁을 점령하고 카란사를 새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패배하여 축출되었습니다. 1917년에는 새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이 헌법은 오늘날까지 멕시코에서 효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사파타는 1919년 매복 공격으로 암살되었고, 판초 비야는 1923년 살해당했습니다. 혁명의 민중 지도자들이 죽으면서 혁명은 약화되었고, 권력은 다시 멕시코 부르주아지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원인
멕시코 혁명의 주요 원인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그로 인한 사회 불의에 있습니다.
실제로 농촌 귀족층이 농업 생산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전체 인구의 3%가 멕시코 최고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외국 자본은 광산, 항만, 석유 개발을 착취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포르피리오 디아스 시대에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의 정부는 소외 계층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한편, 나라를 외국 자본에 개방하여 그를 지지하던 민족주의 엘리트들의 반발마저 불러일으켰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결과
멕시코 혁명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1917년 헌법의 제정입니다. 이 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습니다.
- 토지개혁을 목적으로 한 국가의 토지 수용권 보장
- 원주민의 조상 대물린 토지에 대한 권리 인정
- 최저임금 제도와 8시간 노동제 도입
-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
이 운동의 또 다른 간접적 결과는 멕시코에서 군벌주의(카우디요주의)가 약화된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많은 농민들은 혁명 이후 토지를 잃었습니다. 대농장의 생산물과 경쟁할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토지를 대지주들에게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사파티스모
에밀리아노 사파타 살라사르(Emiliano Zapata Salazar, 1879~1919)는 산미구엘 아네네쿠일코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3만 명이 넘는 병사를 거느린 남부 해방군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혁명의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파타는 토지개혁 실현에 대한 강한 의지와 권력 욕심의 부재 때문에 혁명 진영에서 가장 급진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14년 대통령직을 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거부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사파타의 이념은 사파티스모(Zapatismo)로 이어져 멕시코 정치 체제의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사파타 민족해방군(EZLN)의 창설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멕시코 혁명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 멕시코 혁명은 '멕시코 벽화 운동(Mexican Muralism)'이라 불리는 예술 사조의 주요 주제였습니다.
- 1930년대부터 정치 엘리트들은 혁명의 이상을 제도혁명당(PRI) 안에 결정화했습니다.
- 오늘날에도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국내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멕시코인 중 한 명입니다.
참고 자료
Mexican Revolution, a popular revolution. 다큐멘터리. 2020.05.29. 열람.
Mexican Revolution; 109 years ago, one of the greatest revolutions of the 20th century began. Adventures in History. 2019.11.19. 게재.
Comment la révolution mexicaine a-t-elle répondu aux désirs de changement?. 다큐멘터리. 2019.05.29. 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