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원유 생산, 성장 동력을 잃다
한때 눈부신 성장세를 구가하던 미국 원유 생산이 뚜렷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군림해 온 미국의 올해 원유 생산량 증가폭이 지난 20년 중 가장 작은 수준에 머물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등 에너지 전문기관들의 분석에 따르면, 올해 미국 원유 생산량은 하루 30만 배럴 안팎의 소폭 증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생산이 급감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이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가장 낮은 성장세로, 셰일 혁명이 가져온 고성장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생산량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재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300만 배럴을 웃도는 사상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셰일 혁명의 속도가 늦어지는 이유
유가 하락, 시추의 문을 닫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국제 유가의 하락입니다. 미국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가격이 배럴당 60달러대 초반까지 내려앉으면서, 신규 시추 비용을 충분히 회수하기 어려워진 곳이 늘어났습니다. 실제로 미국 내 석유 시추 리그(장비) 수는 최근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기업들은 수익성이 낮은 우물 개발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성장보다 주주 보상을 우선하는 업계 풍토
과거 셰일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끌어와 무리하게 생산을 늘리는 '성장 우선' 전략을 구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업계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투자자들이 흑자보다는 현금 흐름과 배당,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면서 기업들은 공격적인 시추 확대 대신 자본 규율을 우선하는 경영 방식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는 생산량 증가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잇따른 대형 인수합병의 여파
엑슨모빌의 파이오너 내추럴 리소스 인수, 쉐브런의 헤스 인수 등 석유 업계의 거대 인수합병(M&A)도 성장 둔화의 한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인수합병 이후 기업들은 기존 자산의 효율화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며, 신규 개발 속도가 늦춰지고 있습니다. 경쟁 기업 수가 줄면서 시추 활동 자체가 위축된 측면도 있습니다.
좋은 땅은 이미 채굴됐다?
페름분지를 비롯한 핵심 셰일 지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부지는 이미 상당 부분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은 부지는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개발 비용이 더 많이 드는 경우가 많아, 같은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생산량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는 구조적으로 셰일 생산 증가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글로벌 석유 시장에 던지는 파문
미국 원유 생산의 둔화는 세계 석유 시장에 적지 않은 변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의 셰일 생산은 OPEC(석유수출국기구) 등 전통 산유국의 감산 결정에 맞서 공급 과잉을 억제하는 완충 장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증가폭이 좁혀지면, OPEC+의 공급 조절이 시장 가격에 미치는 영향력이 다시 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글로벌 석유 공급의 여유분이 줄어들면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할 경우 유가가 급등할 위험도 커집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휘발유 가격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공급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양면적 평가가 나옵니다.
앞으로의 전망
다만 이러한 둔화가 영구적인 쇠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셰일 생산의 가장 큰 특징은 대응 속도가 빠르다는 점입니다. 유가가 다시 상승해 수익성이 회복되면 기업들은 단기간에 시추를 늘려 생산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미국 원유 생산이 정체 내지 완만한 성장 국면을 이어가되, 유가 흐름과 글로벌 수요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세계 최대 산유국 미국의 다음 수가 어디로 향할지, 국제 유가와 에너지 안보의 향방이 함께 주목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