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브라질이란?
브라질 역사에서 식민지 브라질(Colonial Brazil)은 1530년부터 1822년까지 약 30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는 포르투갈 왕국이 마르팅 아폰수 지 소자(Martim Afonso de Souza)가 이끄는 최초의 본격적인 식민 원정대를 브라질에 파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532년, 그는 오늘날 상파울루 주 해안에 최초의 정착지인 상비센트 마을(Vila de São Vicente)을 건설했습니다.
선식민지 시기: 파우브라질 순환
포르투갈인들이 새로운 영토에 도착한 직후 첫 번째 경제 활동은 브라질 연안, 특히 북동부 해안에 대량으로 서식하던 파우브라질(브라질나무)의 채취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는 '파우브라질 순환' 또는 선식민지 시기라고 불립니다.
파우브라질 채취는 단순한 자원 수확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인 영토 점거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벌목과 선적을 위한 목재 가공 작업은 원주민들과 해안 무역 거점에 상주하던 소수의 유럽인들이 담당했습니다.
무분별한 남획의 결과로, 1520년대에는 이미 해안 인근의 파우브라질이 고갈되었습니다.
본격 식민화의 시작

포르투갈은 브라질 전역 연안을 조사하고 프랑스 해적과 상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여러 차례 원정대를 파견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정은 크리스토방 자키스(Cristóvão Jacques)가 지휘한 원정(1516년, 1526년)으로, 그는 프랑스 세력과 직접 교전했습니다.
마르팅 아폰수 지 소자(1532년) 역시 프랑스의 해적 행위에 대응하는 한편, 상비센트에 설탕 제분소를 갖춘 최초의 마을을 세웠습니다.
브라질을 효율적으로 식민지화하고 토지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1534년 왕실은 영토를 15개의 세습 카피타니아(capitania hereditária)로 분할했습니다. 이는 해안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정한 경계선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토지 구획이었습니다.
이 땅들은 포르투갈 귀족 출신의 수여자(donatário)들에게 하사되었고, 이들은 스스로 방위와 식민 사업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설탕 생산이 핵심 작물로 선택된 이유는 당시 유럽에서 설탕이 매우 인기 있는 고급 상품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페르남부쿠와 바이아 카피타니아를 중심으로 한 북동부에서 설탕 산업이 가장 크게 발전했습니다. 16~17세기 이 지역은 브라질 사회·정치·경제 생활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총독정부의 설치
카피타니아 제도의 한계에 직면한 왕실은 1548년 식민지 행정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총독정부(Governo-Geral) 제도를 창설했습니다.
첫 번째 총독은 토메 지 소자(Tomé de Souza, 재임 1549~1553)로, 포르투갈 정부로부터 식민지에 적용할 일련의 법령을 위임받았습니다. 이 법령들은 총독정부의 행정, 사법, 군사, 세무 기능을 규정했습니다.
두 번째 총독은 두아르치 다 코스타(Duarte da Costa, 재임 1553~1558), 세 번째 총독은 멩 지 사(Mem de Sá, 재임 1558~1572)였습니다.
1572년 멩 지 사와 그의 후계자 돔 루이스 지 바스콘셀루스가 잇달아 사망하자, 포르투갈 정부는 브라질을 두 개의 관구로 분할했으며, 통합은 1578년에야 회복되었습니다.
- 북부 정부 — 살바도르 소재
- 남부 정부 — 리우데자네이루 소재
1580년 포르투갈과 그 모든 식민지, 즉 브라질까지 스페인 왕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 상황은 164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이베리아 연합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621년, 여전히 스페인 통치 하에 있던 브라질은 다시 두 개의 주로 나뉘었습니다. 즉 마라냥 주(State of Maranhão)와 브라질 주(State of Brazil)입니다. 이 분할 체제는 1774년 폼발 후작(Marquês de Pombal)이 통합을 명령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식민지 브라질의 사회 형성

브라질 식민지 사회는 근본적으로 세 개의 주요 민족 집단, 즉 원주민, 아프리카 출신 흑인, 그리고 주로 포르투갈인인 백인 유럽인의 융합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브라질로 이주한 포르투갈인들은 본국의 다양한 사회 계층 출신이었습니다. 대다수는 귀족과 평민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원주민 부족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일부 부족 간에는 적대 관계가 존재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갈등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강제 이송된 흑인들 역시 저마다 상이한 신앙, 언어, 가치관을 지닌 동질적이지 않은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는 시간이 지나며 포르투갈 문화와 원주민 문화 속으로 흡수·융합되었습니다.
식민지 브라질에서 엔제뉴(engenho, 설탕 농장 겸 제분소)는 모든 사회 생활의 동력 중심이었습니다. 덕분에 '대저택의 주인(senhor do engenho)'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 주변에 모으고 지역 최고의 권위와 명성,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제분소 주변에는 물라토(흔히 주인과 노예 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사제, 노예 흑인, 감독관, 제당 기술자, 자유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했습니다.
포르투갈 지배에 대한 위협
브라질 '발견' 직후 초기 몇십 년간 브라질 연안에는 프랑스 해적과 상인들의 활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입은 1555년에 일어났습니다. 프랑스군은 리우데자네이루를 점령하고 그곳에 '남극 프랑스(França Antártica)'를 세웠으나, 1567년 포르투갈군에 의해 축출되었습니다.
1612년에는 프랑스가 마라냥 지역을 침공하여 '적도 프랑스(França Equinocial)'와 상루이스 마을을 건설했고, 1615년 다시 축출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영국의 공격은 일부 항구를 약탈한 해적 및 사략선의 습격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산투스와 헤시피 시, 그리고 이스피리투산투 연안이 침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두 차례 침입은 포르투갈과 브라질이 스페인 통치 하에 있던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총독정부 소재지였던 바이아가 침공을 받았지만, 네덜란드의 점령은 짧게 끝났습니다(1624~1625).
1630년에는 식민지 최대의 설탕 생산지인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가 네덜란드군에 의해 침공당했습니다.
1637년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 폰 나사우 백작(Maurice of Nassau)이 부임하면서 정복이 본격적으로 공고해졌습니다. 그는 페르남부쿠에 네덜란드 통치를 확립하고 이를 브라질 북동부 거의 전역으로 확장했습니다.
행정 중심지였던 헤시피 시는 도시화되고 위생 시설이 정비되었으며, 도로가 포장되고 다리, 궁전, 정원이 건설되었습니다. 나사우 백작의 통치는 1644년에 종료되었지만, 네덜란드 세력이 완전히 축출된 것은 1654년이었습니다.
황금과 다이아몬드의 세기
귀금속의 발견은 식민 개척자들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드디어 1690년대 미나스제라이스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광산 붐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18세기에는 광업이 본국 포르투갈의 최대 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황금과 다이아몬드 순환은 도시의 성장과 내륙 상업의 발달을 이끌며 식민지 브라질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식민 체제의 위기
1640년경 브라질 무역에서 얻는 수입은 포르투갈 경제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에 본국은 세금 징수와 경제 활동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했고, 나아가 외국인과의 무역마저 금지했습니다.
본국의 억압적인 경제 정책에 대한 불만은 여러 차례의 반란으로 폭발했습니다.
- 베크만의 반란(1684) — 마라냥
- 엠보아바 전쟁(1708~1709) — 미나스제라이스
- 상인 전쟁(Guerra dos Mascates, 1710) — 페르남부쿠
18세기 말에 이르러 포르투갈 지배로부터 식민지를 해방하려는 독립 운동이 등장했습니다.
- 미나스 음모(Inconfidência Mineira, 1789)
- 바이아 음모(Conjuração Baiana, 1798)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유럽의 격변은 포르투갈 왕국의 중심지를 브라질로 이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815년 브라질이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으로 격상되면서 이 땅은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게 되었고, 마침내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이 실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