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콘셀헤이로(1830~1897)는 브라질 북동부의 종교 지도자이자 벨루몬테 마을, 즉 널리 알려진 카누두스(Canudos)의 창시자였습니다.
그는 당대에 종교 광신도로 규정되었는데, 이는 공화 정부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분이었습니다.
안토니오 콘셀헤이로의 생애
본명은 안토니우 비센치 멘지스 마시엘(Antônio Vicente Mendes Maciel)로, 1830년 3월 13일 현재의 브라질 세아라주 키세라모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모는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는데, 당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공부하고 사회적 지위를 올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성직자였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오는 읽고 쓰는 법을 익혔으며, 세르탕(브라질 북동부 내륙)을 떠도는 성인 전기, 기사 문학, 신비주의 서적을 폭넓게 읽었습니다. 심지어 종교재판소가 금서로 지정한 저술들까지 탐독한 독서가였습니다.
신학교 입학이 좌절되자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도왔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내와 장모와 함께 내륙 순례의 길에 나섰습니다.
유랑 생활 동안 그는 교사, 필기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바이아, 세르지피, 페르남부쿠의 오지를 돌며 명성이 퍼졌고, '콘셀헤이로(조언자)'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이는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며 고통받는 이들을 기꺼이 도왔다는 인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살인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수감됩니다. 출옥 후에는 북동부 오지를 돌며 돌을 모아 낡은 교회를 재건하고 '불행한 이들'을 만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해방된 노예, 토지를 잃은 원주민,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신도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그는 교회, 둑, 다리, 묘지를 건설했고 그의 권위는 날로 커져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순례자의 삶을 접고 카누두스라 불리는 마을에 정착했으며, 이곳의 이름을 '벨루몬테(Belo Monte)'로 바꾸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지방과 중앙 정부 모두에게 골칫거리가 될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카누두스라는 '나쁜 선례'를 끝내기 위해 연방 정부는 대규모 학살을 감행했고, 콘셀헤이로의 마을과 생명은 비참하게 끝을 맞이했습니다.
카누두스에서의 삶
카누두스에는 약 5,200채의 가옥에 약 3만 명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콘셀헤이리스타'라고 불린 주민들은 공동으로 생산된 재화를 함께 누렸습니다. 환자를 돌보기 위한 공동 기금이 운영되었고, 노동의 결실은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나누어졌습니다.
이곳은 "우유가 강처럼 흐르고 골짜기마다 옥수수 쿠스쿠스가 넘쳐나는" 약속의 땅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안토니오 콘셀헤이로의 말에 깊이 감동한 이유는, 전통적인 설교자들의 말과 달리 그의 가르침이 물질적·영적 진보로 이끌어 주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카누두스 전쟁
카누두스 전쟁은 빈곤층을 더욱 철저히 배제한 갓 선포된 공화국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참고로 남부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갈등인 콘테스타두 전쟁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벨루몬테는 바이아 주 정부에 큰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주민들이 세금을 내지 않았고, 목장들은 값싼 노동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벨루몬테 마을이 급성장하자 바이아 당국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종교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평화적으로 마을을 해산시키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콘셀헤이리스타'들은 흩어지기를 거부하며 사제와 전통 교회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교착 상태에 이르자 육군은 벨루몬테 마을을 무력으로 제거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친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전투는 격렬하고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으며, 1897년 10월 5일 마을의 완전한 파괴로 막을 내렸습니다.
안토니오 콘셀헤이로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 안토니오 콘셀헤이로가 지은 성당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바이아주 크리조폴리스의 본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 실제로 카누두스에는 세 개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마을은 코코로보 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가뭄이 들면 교회 폐허를 볼 수 있습니다.
- 카누두스 전쟁은 상파울루 소속 기자 에우클리지스 다 쿠냐(Euclides da Cunha)가 취재했으며, 이 취재 활동은 그의 걸작 『오스 세르톡스(Os Sertões)』 집필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