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갈리아 시대에 아르베르니(Arverni)는 현재 오베르뉴(Auvergne) 지역에 자리 잡은 번영하고 영향력 있는 부족이었다. 이들은 대중에게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라는 인물과, 위대한 '저항의 지도자'의 방패를 찾아 나서는 아스테릭스 만화의 주인공으로 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르베르니는 이러한 에피날(Epinal)풍의 이미지 그 이상이다. 그들은 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 중 하나였으며, 카이사르가 주도한 전쟁 훨씬 이전부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역사 속 아르베르니의 등장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부족의 역사를, 민족지학자나 포시도니오스(Posidonius of Apamea), 아피아노스(Appian) 같은 외국의 역사가, 혹은 정복을 정당화하려는 정복자들의 파편적인 기록만으로 쓸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최근 고고학 발굴 성과는 중부 갈리아의 변화를 대표하는 이 부족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아르베르니 기원은 불확실하다. 리비우스(Livy)는 그들이 기원전 600년경 혹은 그다음 세기에 벨로베소스(Bellovesos)의 원정대(로마사 V, 34)에 합류했다고 전한다. 비투리게스(Bituriges) 왕 암비가토스(Ambigatos)의 조카였던 벨로베소스는 인구 과잉을 해소하고자 새로운 영토를 찾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 벤체슬라스 크루타(Wenceslas Kruta)에 따르면 이 사건은 인수브레스(Insubres)족의 도시 메디올라눔(Mediolanum, 현 밀라노)의 건국 신화일 가능성이 크다.
아르베르니가 로마 사료에 확실하게 등장하는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때다. 기원전 207년, 그들은 스페인에서 한니발(Hannibal)을 돕기 위해 온 하스드루발(Hasdrubal)에게 병력을 제공했다(리비우스, 로마사 XXVII, 39). 이 시기부터 그들에 대한 정보는 늘어나지만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들은 주도적인 부족이었으며, 아이두이(Aedui)족과 갈리아 내 패권(hegemony)을 다투었다. 여기서 패권이란 그리스어적 의미, 즉 이웃 부족들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우위를 뜻한다. 아르베르니의 패권은 절정기에 중부와 남부 갈리아까지 미쳤다.
이름이 전해지는 첫 번째 아르베르니 왕은 루에른(Luern, 기원전 2세기 중반)이다. 그는 엄청난 부와 화려한 호화로움으로 유명했다. 아테나이오스(Athenaeus)의 현인들의 만찬(Deipnosophists)에 인용된 아파메아의 포시도니오스 단편(기원전 135년경~기원전 51년경)은 그의 위세를 생생히 전한다. "루에른은 민심을 얻고자 마차를 타고 들판을 돌며 수많은 켈트족 추종자들에게 금과 은을 뿌렸다. 그는 12스타디온²(약 4.3ha)의 공간을 둘러막고, 그곳에 고급 술이 가득 찬 술통들과 끊임없이 제공되는 엄청난 양의 음식을 마련해 며칠 동안 원하는 누구나 들어와 먹고 마시게 했다."
이어서 '왕권'의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왕'이란 용어는 갈리아어 rix에 해당하며 라틴어 렉스(rex)와 유사하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군주와는 다르다. 오르게토릭스(Orgetorix), 암브로릭스(Ambiorix), 킨게토릭스(Cingetorix), 둠노릭스(Dumnorix), 그리고 유명한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처럼 갈리아 인명에 -rix 접미사가 흔히 붙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장루이 브뤼노(Jean-Louis Brunaux)에 따르면 갈리아의 왕은 '최고 권위의 보유자'(갈리아 기행, 150쪽)가 아니라, 일정 기간 도시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집정관(magistrate)이었다. 전사 사회에서 전장 밖의 개인적 권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스테판 피히틀(Stéphan Fichtl)이나 프레데리크 트레망(Frédéric Trément) 등은 '전통적 왕정'에서 '과두정'으로의 체제 전환이 있었다고 보는데, 아르베르니의 경우 루에른의 아들 비투이트(Bituit) 치세 말기에 이 변화가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의 남부 갈리아 진출과 킴브리족(Cimbri)의 침입이 아르베르니의 패권을 흔들었다. 로마는 마살리아(Massalia) 동맹의 살뤼에스(Salyens)족 대비 요청과, 아이두이족의 '아르베르니가 영토를 황폐화시켰다'는 호소에 응답했다. 기원전 125년 알프스를 넘은 로마는 살뤼에스족과 그 동맹인 보콘테스(Vocontes), 리구리아(Ligurian)족의 영토를 잠식해 나갔다. 켈트-리구리아 연합군은 패배했고, 살뤼에스의 수도 엔트레몽(Entremont)이 기원전 123년 함락되어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살뤼에스 추장들(dunastai)과 왕 테우토마토스(Teutomatos)는 알로브로게스(Allobroges)족에게 망명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선택은 우연이 아니었다. 살뤼에스족이 알로브로게스족과 함께 아이두이족을 공격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 부족 간 동맹과 특수 관계가 형성되었다. 알로브로게스족은 망명자들을 넘기려 하지 않았고, 아르베르니 왕 비투이트는 아피아노스 기록대로 로마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전개에 대한 고대 사료가 제각각이라 온전한 서사 복원은 어렵다. 외교가 결렬되자 전쟁만이 남았다. 알로브로게스족이 빈달리움(Vindalium) 인근에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Cneius Domitius Ahenobarbus)에게 패한 뒤, 기원전 121년 비투이트의 군대는 론(Rhône) 강과 이제르(Isère) 강 합류 지점에서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의 군대(도미티우스 군대와 합류)에 격파되었다. 승전 기념 트로피가 세워졌고,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개선식과 '알로브로기쿠스(Allobrogicus)'라는 아그노멘(agnomen)을 받았다.
동맹국인 알로브로게스족과 살뤼에스족과 달리 아르베르니는 독립을 유지했다. 로마가 강화 조약으로 정치 체제 변경을 강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훗날 과두정 등장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왕 비투이트는 개선식에 끌려가 "형형색색의 무장을 하고 은빛 수레를 탄 비투이트 왕만큼 개선식에서 눈길을 끈 이는 없었다"(플로루스, 로마사 요약 I-37)고 기록될 만큼 화려한 모습으로 전락했다. 루에른의 아들은 아들 콩겐티아트(Congentiat)와 함께 알바(Alba)에서 유배 생활을 마감했다. 콩겐티아트는 나중에 귀환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아르베르니의 남부 갈리아 패권은 끝났고, 북쪽 국경에 나타난 위협적 강국 로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베르니의 영토
아르베르니 영토는 현재 퓌드돔(Puy-de-Dôme) 주 전체와 알리에(Allier), 오트루아르(Haute-Loire), 캉탈(Cantal) 주의 일부를 아우른다. 루아르(Loire) 강 하구로 통하는 알리에(Allier) 강 등 주요 교통로가 관통한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 영토가 파기(pagi)로 나뉘어 있다고 전한다(갈리아 전쟁기 VII, 64, 6). 하지만 기원전 3세기부터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평원을 중심으로 강한 중심성이 확인된다. 이는 아이두이족(원심적 구조)이나 비투리게스족(오피다 균일 분포)과는 다른 양상이다.
클레르몽페랑 동쪽 몇 킬로미터에 자리한 강데이야/라 그랑드 본(Gandaillat/La Grande Borne) 유적(약 150ha)은 기원전 3~2세기 아르베르니 도시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로마 문헌에 보이는 수도 네모소스(Nemossos)일 수도 있다. 이 유적은 기원전 2세기 말'abandon되고, 코랑(Corent), 게르고비에(Gergovie), 공돌(Gondole) 세 개의 오피다(각 약 70ha)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다만 외곽의 베그(Bègues), 생쥐스트드바피(Saint-Just-de-Baffie), 퀴세(Cusset) 오피다들도 중요한 2차 중심지였을 수 있다.

아르베르니 영토는 기원전 3세기부터 인구와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심장부인 리마뉴(Limagne) 평원은 조밀하게 인구가 밀집해(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세기 초 20만~30만 명 추정), 아르베르니의 '곡창' 구실을 했다. 이곳 농업은 집약적이었으며, 대규모 관개와 배수 시설이 필수였다. 이러한 개발은 침식 가속, 흑토 퇴적, 삼림 벌채, 기후 변동 등 부작용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동반했다. 영토 전역에서 금광을 비롯한 광산도 확인된다.
공예 기술도 뒤지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 '표준 식기 세트'의 등장이 포착되며, 같은 시기 채색 도기(painted ceramics)도 다수 출토된다. 이들은 기원전 1세기 생산 표준화와 함께 사라진다. 교역 활성화로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일상적으로 쓰이는 고유 화폐가 주조되었고, 그 유통 범위가 도시 경계를 넘어섰다(프랑스 남부에서 출토된 '장발 갈리아(Gaule Chevelue)' 지역 주화 중 상당수가 아르베르니산). 이는 그들의 지역 경제적 위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발전과 함께 이탈리아산 와인 암포라 수입이 급증했는데, 이는 로마 문명에 대한 도시의 매혹이 커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카이사르 정복 직전의 아르베르니
기원전 1세기 아르베르니의 영향력은 카두르키(Cadurci), 가발레스(Gabales), 벨라비(Vellavi), 엘루테테스(Eleutetes) 부족 정도로 축소되었으나, 앞서 본 경제적 기반 덕분에 위상은 여전히 상당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도시는 로마와 유사한 과두정을 채택한 귀족 계층이 통치했다. 이들은 의회(코랑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에서 토론하고 권력을 다퉜다. 주화 도안의 개성화와 연회 문화의 성행은 정치적 경쟁의 치열함을 방증한다. 내분에도 불구하고 영토 내 정치적 통제는 강화되어 '외부' 주화 유입은 드물어졌다. 이 귀족층은 방대한 농장을 소유했는데, 샤니아-말랭트라(Chaniat-Malintrat) 무덤에서 무기, 장신구, 암포라, 금속 식기 등이 출토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코랑 발굴은 이 귀족들의 부와 세련된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대저택은 로마식 모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아르베르니는 정복 이전부터 로마 건축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코랑 유적의 기원전 1세기 초 목조 신전은 지중해 연안의 그것들을 연상시킨다. 마티외 푸(Mathieu Poux) 등은 코랑의 공공 광장을 로마 포룸(Forum)과 비견하며, 카이사르가 카르누테스(Carnutes)족의 아바리쿰(Avaricum)을 묘사할 때 언급한 것과 알레시아(Alésia)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확인된다고 지적한다. 다만 이 포룸들을 제정기 로마의 잘 보존된 포룸과 직접 비교해서는 안 된다.
주거 양식도 이탈리아식 가정 건축을 모방했다(포졸라나 모르타르 바닥재와 유사한 분쇄 포졸란 마감재, 중정(中庭)을 둔 평면도 등). 아르베르니의 근대화는 명백히 로마 모델을 지향했다. 이는 기원전 1세기 전반 내내 로마에 대한 태도와 새로운 관습 수용을 둘러싼 심각한 정치적 긴장을 낳았으며, 갈리아 전쟁에서 폭발하게 된다.
갈리아 전쟁 속의 아르베르니
전쟁 초기 아르베르니는 로마와 맺은 조약(foedus)을 준수하며 관망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가 봉기의 선봉에 서며 중립은 깨졌다. 그의 생애와 역할을 여기서 다 다루기엔 벅차니 핵심만 짚자. 그는 몇 년 혹은 몇 십 년 전 갈리아에 왕정을 강요하려 했던 켈틸로스(Celtillos)의 아들이다. 라우랑 라모안(Laurent Lamoine) 등 일부 학자는 켈틸로스를 실질적 권력 없는 유력 가문 출신(magnate)으로 보기도 한다.
반로마 '파벌'을 이끌던 켈틸로스는 도시 기관에 의해 처형되었고, 아들 베르킨게토릭스는 정치적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수행원(아마도 인질로 파견된 도시 대표단 일원)으로 종군하며 로마의 군사·정치 노하우를 익혔다. 귀국 후 권력 장악과 저항 구상은 친로마파 귀족들의 이해와 충돌했다. 숙부이자 친로마파 핵심인 고바니티오(Gobannitio)가 그를 게르고비에에서 추방했다. 기원전 53년 말~52년 초, 카르누테스족이 케나붐(Cenabum)에서 로마 상인들을 학살하며 켈트 갈리아의 봉기 신호탄을 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권력을 잡았다. 사촌 베르카시웰라우노스(Vercassivellaunos)나 '고귀한 출신으로 큰 존경을 받던' 크리토그나토스(Critognatos) 같은 현지 귀족들이 합류했다. 그는 타 부족에 사절을 보내 연대를 구축하고 봉기의 총지휘자가 되었다. 게르고비에 승리 후 반군의 여정은 기원전 52년 알레시아 패배로 막을 내렸다.

반란 진압 후 아르베르니 도시는 다시 로마 편에 섰다. 'EPAD' 주화로 확인되는 에파스낙토스(Epasnactos)는 기원전 50년대부터 도시 내 실력자였다. 갈리아 전쟁 중에는 기마병 도안의 'EPAD' 주화를, 정복 후에는 보병과 로마 군기(軍旗) 도안의 주화를 발행했는데, 후자의 무게가 로마 퀴나리우스(quinarius)와 일치한다. 로마 지배 수용이 주화 제도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는 줄곧 친로마파였으며, 로마가 구축하려는 새 질서에서 든든한 협력자였음이 틀림없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를 너그럽게 대우해 자유도시(civitas libera) 특권을 부여했다. 아르베르니는 이에 보답하듯 다시는 중앙 권력에 대항하지 않았고, 훗날 내전에도 가담하지 않았다(다른 도시들과 대조적). 기원전 1세기 말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행정 중심지가 아우구스토네메툼(Augustonemetum, 현 클레르몽페랑)으로 이전된 것은 이 부족의 로마 편입을 확정짓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세기 퓌드돔 정상 메르쿠리우스 아르베르니 신전 건립은 로마 세계로의 완전한 편입을 알리는 마침표였다.
결론: 철기 시대 중부 갈리아의 거울
아르베르니는 중부 갈리아 철기 시대 사회가 겪은 변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닌 강대 부족이 처음엔 로마에 맞섰으나, 점차 이웃 강국의 호의를 구하려 애썼으며, 그 과정에서 베르킨게토릭스 봉기 같은 격렬한 내부 분출도 있었다. 이들은 일찌감치 로마의 영향을 받아 경제 교류를 확대하고 로마 모델에 점점 더 강하게 끌렸다. 정복은 이러한 점증하는 지배의 귀결에 불과했다. 로마 시대 사료 부족으로 이들의 역사를 더 쫓기는 어렵지만, 레주(Lezoux)의 시길라타(sigillata) 도기 생산과 집약 농업 지속으로 경제적 비중은 여전했고, 오늘날 단편적으로만 보이는 정치적 위상도 상당했으리라 짐작된다.
1세기 제노도로스(Zenodorus)가 제작한 신전용 메르쿠리우스 상이나, 2세기 초 황제상으로 추정되는 거대 조각상 발 등 일부 조각상들은 아르베르니 장인들의 높은 예술 수준을 입증한다. 5세기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Sidonius Apollinaris)는 로마 문화의 수호자이자 황제 측근으로, 성직자가 되어 자국민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저술 덕분에 더 많은 사료를 확보할 수 있는데, 그의 인생 여정 역시 당대 갈리아 귀족의 전형적 궤적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BRUNAUX Jean-Louis, Voyage en Gaule, Seuil, 2011.
- BRUNAUX Jean-Louis, Les Gaulois, Belles Lettres, 2005.
- BRUNAUX Jean-Louis, Alésia, Gallimard, 2012.
- KRUTA Wenceslas, Les Celtes : Histoire et Dictionnaire. Des origines à la romanisation et au christianisme, Robert Laffont,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