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클로비스 1세: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 (482~511)

클로비스 1세: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 (482~511)클로비스 1세(Clovis I)는 482년부터 511년까지 프랑크족의 왕으로 군림한 가장 빛나는 메로빙거 왕조의 군주입니다. 5세기와 6세기의 전환기에 전설적인 왕 메로베우스(Mérovée)의 손자였던 그는 로마령 갈리아의 거의 전역을 정복했습니다. 방대한 영토에 대한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도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영리하게 동맹을 맺었습니다. 498년경 수천 명의 전사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 클로비스는 정복자인 프랑크족과 피정복자인 갈로-로마인을 동등한 지위에 놓아 이 두 민족을 단일 민족, 즉 레그눔 프란코룸(Regnum Francorum, 프랑크인의 왕국)으로 융합시켰습니다. 1세기 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Grégoire de Tours)가 저술한 프랑크인의 역사는 클로비스 통치기에 관한 몇 안 되는 주요 사료로 남아 있습니다.

클로비스 통치 이전의 갈리아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오랫동안 사학계에서 중세의 시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전환기가 훨씬 길었고, 변화가 복잡했으며, 소위 '야만족의 침입'이 수십 년 만에 로마를 휩쓸었다는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클로비스 1세: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 (482~511)소위 '야만족'이라 불리던 민족들은 이미 다양한 형태와 정도로 제국 내에 정착해 있었습니다. 현대 사학은 '민족 생성(ethnogenesis)' 개념을 통해 갈로-로마 인구와 야만족 간의 '융합'을 설명합니다. 5세기 갈리아에 들어간 이들은 이미 로마 문명에 익숙했으며, 그와 결합해 새로운 민족을 형성했습니다. 게르만족은 5세기 초(410년 로마 약탈 등) 제국이 겪은 위기 이래 갈리아에 존재했습니다. 서고트족은 갈리아를 가로질러 아키텐과 스페인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부르고뉴족이 리옹과 제네바 일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세기 말이 되어서야 '프랑크족'(특히 미래의 '살리 프랑크족')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들은 라인 강을 건너 다소 늦게 갈리아에 나타났습니다. 클로디오 왕이 캉브레를 잠시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448년 밀리타리 마스터 아에티우스와 미래의 황제 마조리아누스에게 격퇴당했습니다. 덕분에 프랑크족과 그들의 왕 클로디오, 그의 아들 메로베우스, 손자 힐데리크 1세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클로비스 이전까지 수많은 프랑크족 왕들이 난립하여 어느 누구도 여러 프랑크 부족을 통일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오랫동안 남진이 좌절되었습니다.

이 민족들이 결국 영구히 정착했으며, 갈로-로마인들과의 관계가 결코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또한 그들의 지도자들은 로마 중앙 권력에서 점점 독립적이던 로마 장군들 혹은 로마와 조약(페데라티)을 체결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갈로-로마인과 '연방' 야만족 가릴 것 없이 아틸라의 훈족이라는 위협에 맞서 갈리아를 방어했으며, 451년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에서 훈족을 격파했습니다.

그로부터 25년 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실각은 갈리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갈리아는 남쪽에 스페인에서 루아르 강까지 뻗은 강력한 서고트 왕국, 동쪽에 론 강을 따라 부르고뉴족, 북쪽에 뫼즈 강 양쪽의 살리 프랑크족과 라인 프랑크족, 그리고 루아르 강과 수아송 사이에 끼어 있는 시아그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왕정' 잔존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아그리우스가 클로비스의 상대가 되었습니다.

클로비스의 초기 정복

클로비스는 힐데리크 1세와 튀링겐의 공주 바시나(Basina)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482년(혹은 481년) 부친을 계승한 살리 프랑크족의 왕은 여느 야만족 지도자처럼 경쟁자들을 제압하며 권위를 세워야 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정복이었습니다. 라인 프랑크족이 알레만니족과 싸우느라 바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캉브레 인근의 강력한 살리 프랑크족을 어떻게 제압했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건 클로비스는 즉위 직후 솜 강 계곡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습니다.

시아그리우스는 명문 갈로-로마 가문 출신입니다. 480년경 그의 세력은 루아르 강과 솜 강 사이, 수아송 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로마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이를 제거하려는 클로비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은 시아그리우스는 군대를 모아 살리 프랑크족을 막으려 했으나, 486년경 수아송 전투에서 클로비스에게 패배했습니다. 시아그리우스는 서고트 왕 알라리크 2세에게 도피했으나 얼마 후 프랑크족에게 넘겨졌습니다. 유명한 '수아송의 항아리' 사건은 이 전투 직후 벌어졌으며, 클로비스의 권위 확립과 갈리아 교회와의 미래 화해를 예고했습니다.

수아송 항아리 사건

수아송 승리 후 클로비스는 병사들의 약탈, 특히 교회 약탈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전리품은 모아진 뒤 모든 전사에게 계급과 상관없이 똑같이 분배되었습니다. 왕의 몫도 제비뽑기로 정해졌습니다. 수아송 주교의 사절단이 약탈당한 교회에서 나온 훌륭하고 무거운 은제 항아리의 반환을 요청했습니다. 클로비스는 그것을 갖고 싶었으나 제비에서 당첨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아리를 받은 병사에게 양보를 요청했으나, 병사는 거절하며 도끼로 항아리를 내려쳤습니다.

클로비스 1세: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 (482~511)이 일격이 항아리를 깨뜨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찌그러뜨린 것에 불과했습니다. 클로비스는 평등 분배가 족장과 전사 사이의 계약임을 들어 이 도발에 즉각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사열 자리에서 그 병사를 마주한 클로비스는 무기 관리가 소홀하다는 핑계로 그의 도끼를 빼앗아 땅에 던졌습니다. 병사가 주우려 허리를 굽히자 클로비스는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려치며 말했습니다. "너가 수아송 항아리를 대했던 것처럼!" 그러고는 시신을 매장하지 않은 채 떠나버렸습니다.

이 일화는 클로비스가 분배 과정에서 당한 모욕을 끈질기게 기억하는 앙금 깊은 인물로 비치게 합니다. 동시에 사열을 통해 군주로서의 위상이 부각됩니다. 병사의 복장과 장비 점검은 프랑크족뿐만 아니라 로마인에게도 중요한 관례였기에 연례 행사로 행해졌습니다. 또한 로마 군제의 전통에 따라 클로비스는 부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졌으며, 불복하는 전사를 제거해 나머지의 충성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클로비스를 전제 군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복수하는 순간에도 그는 군사적 규율을 준수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클로비스와 성직자들의 관계도 보여줍니다. 항아리를 사절단에게 돌려주려 애쓰고 교회 약탈을 못마땅해한 태도는 교회의 호의를 얻고자 한 그의 정치적 필요성을 드러냅니다.

외교가이자 전사, 클로비스

클로비스는 지역 강국들과 적극적인 동맹 정책을 폈습니다. 특히 동고트 왕 테오데리크에게 여동생 아우도플레데를 시집보냈습니다. 더 나아가 동로마 황제 제노, 뒤이어 아나스타시우스의 정통 대리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같은 시기 부르고뉴 왕의 조카 클로틸데와 혼인했습니다.

500년경 부르고뉴 왕국의 왕위 계승 분쟁은 개입의 명분을 주었습니다. 부르고뉴 군데바우트 왕이 클로틸데의 일족을 몰살시켰기 때문입니다. 디종 근처 전투에서 패하고 아비뇽에서 포위된 군데바우트는 클로비스에게 조공을 바치고 신하가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은 정복을 이어가 6세기 초 톨비악 전투에서 알레만니족을 격파하고 라인 프랑크족을 복속시켰습니다.

이어 남쪽의 최대 라이벌 서고트족을 겨눴으나, 알라리크 2세와 동맹을 맺은 테오데리크의 견제로 잠시 멈칫해야 했습니다. 507년 부르고뉴족과 연합해 서고트 왕국을 공격, 부이유 전투에서 알라리크 2세를 전사시키고 툴루즈까지 진격했습니다. 이후 아키텐을 점령했습니다. 한편 프랑크족의 팽창을 견제하려 동고트 테오데리크가 프로방스를 차지했습니다. 508년 클로비스는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로부터 집정관(Consul) 직위를 공식 인정받아, 야만족과 제국 간의 긴밀한 유대를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공고화

영토가 크게 확대되자 클로비스는 통치 체제를 정비해야 했습니다. 그는 508년경 파리에 정착해 수도로 삼았는데, 이는 성녀 주느비에브와 부친 힐데리크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아직 '궁정'이라 불릴 만한 고정 기관은 아니었고, 법정은 오랫동안 순회를 계속했습니다. 클로비스는 가차 없이, 때로는 잔인하게 모든 경쟁자들을 제거했습니다. 가족 내 경쟁자까지 처형했으며, 리푸아리 프랑크족 왕과 캉브레 왕을 차례로 죽여 모든 프랑크 부족을 통일했습니다. 말년에는 갈리아의 4분의 3을 장악했고, 론 강 유역과 지중해 연안만이 그의 손아귀 밖에 남았습니다.

클로비스 1세: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 (482~511)

주민들에 대해서는 갈로-로마인에게 그들의 법(로마법)을, 게르만족에게는 로마가 갈리아의 동맹들에게 부과했던 규율을, 프랑크족(살리·라인)에게는 살리카 법전과 고유 관습을 각각 유지시켰습니다.

500년 이후(추정) 12월 25일 랭스 주교 레미(레미기우스)로부터 클로비스와 전사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갈리아 주교들의 지지를 확고히 얻었습니다. 이 분야에서 클로비스는 제국 전통을 존중해 사망 직전 오를레앙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이래 황제가 교회의 법규를 정하는 권한을 가졌으나, 프랑크 주교단은 이미 특정 영역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클로비스의 아들들, 최초의 '프랑크인의 왕들'

클로비스는 511년 11월 27일 사망했습니다. 최초의 렉스 프란코룸(Rex Francorum, '프랑크인의 왕') 칭호를 사용한 군주로, 그의 후계자들이 이 칭호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파리 생트주느비에브 수도원(현 앙리 4세 리세 자리)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승계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소생이 아닌 맏아들 테우데리크가 단독 후계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 클로틸데의 압박으로, 방대한 왕국은 네 아들 사이에 분할되었습니다. 킬데베르트(노르망디~파리), 클로타르(갈리아 북부), 클로도미르(루아르 계곡), 테우데리크(라인 지역). 아키텐의 귀속은 정복 직후 상황이 복잡해져 불분명했습니다.

이 분할은 갈리아에 대한 프랑크족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팽창은 계속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 G. 뷔레르-티에리, C. 메리오, 프랑스 이전의 프랑스 (481-888), 벨랭, 2010.
  • 조르주 보르도노브, 클로비스와 메로빙거 왕조, 피그말리온, 2009.
  • 투르의 성 그레고리우스, 프랑크 왕들의 역사, 폴리오 히스토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