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6세기 프랑스 왕들이 총애한 미뇽, 미뇽, 대미뇽의 역사

일반적인 기억 속에서 '미뇽(mignons)', '귀여운 자들', '정말 귀여운 자들'이라는 이름은 스캔들을 연상시키며, 특히 앙리 3세 치세 동안 조롱과 멸시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왕과 왕비, 고위 인사들은 매우 자주 총애하는 신하, 즉 신뢰하는 측근이자 내밀한 친구를 곁에 두었으며, 이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정치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부여했습니다. 사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고대와 중세에도 총신(寵臣)은 존재했지만,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난 시기는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입니다.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프랑수아 1세 시대의 총신은 국왕이 국정을 현명하게 처리하도록 의지할 수 있는 친밀한 인물이자 공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궁정 신하 중에서 선발된 그는 공로를 바탕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프랑스 최초의 총신인 안 드 몽모랑시(Anne de Montmorency)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1493년생인 그는 군사적 재능을 입증해 23세에 백인대장이 되었고, 27세에 시종장, 29세에 프랑스 원수, 1526년에는 프랑스 대장관과 랑그독 총독을 거쳐 12년 뒤 프랑스 대총관이 되었습니다. 국왕과 나란히 거처하며 왕의 침실에서 잘 수 있는 영예를 누렸고,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진정한 정부 수반으로 여겨지는 총신이었습니다.

앙리 2세 시대

프랑수아 1세가 죽자 앙리 2세는 안 드 몽모랑시를 그대로 기용하며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국왕의 고문이자 심복, 친구로서 왕과 궁정 신하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분위기는 바뀌었습니다. 기즈 가문과 몽모랑시 가문이라는 두 대가문이 프랑수아 2세 즉위기에 권력을 잡기 위해 다투었는데, 국왕이 서거하면 후계자가 기존의 총신을 내치고 자기 사람을 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앙주 공작의 변화

앙주 공작(훗날 앙리 3세)은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접근하기 쉬운 군주로, 예의 바르고 편안한 성품으로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왕태후의 궁정에서 주요 인물이었던 이들의 아들인 어린 시절 친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라로셸 공방전을 거치며 앙주 공작은 진정한 파벌의 수장이 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결속된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폴란드 원정은 이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첫 공식적 관직이 주어지는 기회였습니다. 반면 국왕은 원로들에게 의지할 수 있었고, 그들의 노련함 덕분에 1574년 프랑스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앙리 3세의 변모

16세기 프랑스 왕들이 총애한 미뇽, 미뇽, 대미뇽의 역사

앙리 3세가 즉위하자 왕태후는 빌리에르(Villequier), 벨가르드(Bellegarde), 르 게스트(Le Guast)로 구성된 첫 번째 총신 그룹을 국왕 주변에 배치했습니다. 이들은 왕과 귀족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며 국왕 알현을 독점하고 왕권을 대변했습니다. 여기에 출신이 미미하고 재력도 없던 젊은 리뇰롤(Lignerolles)이 합류했습니다. 앙리는 궁정 생활을 개혁하고 18~24세의 젊은 친구들로 자신을 에워쌌습니다. 그는 기상 의식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궁정인의 출입을 금지하며, 세련된 예절을 강요하고 용모가 단정치 않은 자의 접근을 막는 등 친밀함과 신뢰, 자유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스스로 궁정의 주인이자 조직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그는 유력 가문의 후계자들이 아닌 2부 귀족(하위 귀족)에게 특혜를 베풀어, 대가문과 권력 가문의 상속자들을 자극하며 새로운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두 번째 총신 그룹의 형성…

이 두 번째 그룹은 위그노 전쟁과 특히 폴란드 원정 중에 싹튼 우정을 바탕으로 1574년부터 앙트라게(Entraguet), 카일뤼(Caylus), 생메그랭(Saint-Mégrin), 모지롱(Maugiron), 리바로(Livarot), 생술피스(Saint-Sulpice), 수브르(Souvre), 그라몽(Gramont), 생뤼크(Saint-Luc), 오(O)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파리에서 수학하며 검술과 승마를 익혔고, 이미 국왕과 교류하며 측근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라몽, 리베라크(Ribérac), 숌베르그(Schomberg) 형제가 나중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을 곁에 두기 위해 국왕은 원로들의 관직을 그들에게 넘겼지만, 그 대가로 벨가르드는 프랑스 원수가 되어 유일하게 제약 없이 왕의 처소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르 게스트는 근위대 진영장(캠프 마스터)이 되어 군사적 네트워크의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 '왕의 미뇽'으로

이 젊은 친구들과 궁정인들은 연회에 참여하며 복장, 행동, 향유 방식 등 모든 면에서 국왕을 모방했습니다. 이들은 즉시 개신교도들로부터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거리 행진에서 허례허식에 빠져 산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 역시 1517년 자신의 친구들과 똑같은 짓을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이들은 '왕의 미뇽(Les mignons du roi)'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미뇽'이라는 용어는 중세 말 프랑스어에 등장했으며, 16세기 초에는 고위 인사의 측근에서 양성되어 충성과 헌신을 대가로 공식적 품위를 가진 궁정인을 뜻했습니다. 그러다 16세기 중반에는 민중에게 '사회적 무질서'를 의미하며, 세련됨, 부드러움, 미모, 친밀함, 성적 문란함과 결부되어 '귀여운 잠자리 상대'라는 말까지 파생되었습니다.

민중은 처음에는 이를 비웃었지만, 국왕이 스스로를 '폐하'라 칭하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576년부터 이 용어는 성적·멸시적 뉘앙스를 띠게 되었습니다. 국왕의 비호 아래 발생한 풍기 문란과 살인 사건은 그들의 입지를 좁혔고, 국왕 자신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연대기 작가 피에르 드 레스토일(Pierre de l'Estoile)은 <앙리 3세 치세 일기>에서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미뇽'이라는 이름이 그 무렵 민중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그들의 장난스럽고 오만한 행실, 여성스럽고 뻔뻔한 화장과 복장, 그리고 국왕이 그들에게 베푼 엄청난 선물과 은전(민중은 이것이 국왕 몰락의 원인이라 여겼다) 때문에 매우 미움받았다. 이 아름다운 미뇽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인위적으로 곱슬곱슬하게 말아 작은 벨벳 모자 위로 올렸는데, 보르도의 창녀들 같았으며, 목에 두르는 주름 깃(프라프)은 반 자나 되어 마치 접시 위의 세례 요한 머리처럼 보였다. 옷차림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의 일상은 도박, 신성모독, 뛰기, 춤추기, 날뛰기, 다투기, 수다 떨기, 그리고 왕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그를 기쁘게 하려 말뿐이었다. 신과 덕에는 관심이 없고, 하느님보다 더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주인에게 총애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내 부대"

16세기 프랑스 왕들이 총애한 미뇽, 미뇽, 대미뇽의 역사

즉위 2년 후, 약 스무 명의 미뇽이 국왕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국왕이 '내 부대(ma troupe)'라 부르던 이 젊은이들은 지방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신사들의 아들로, 프랑스 내 왕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기용되었습니다. 미뇽들은 형제애와 우정, 평등이 지배하는 그룹을 형성해 '폐하'를 빛내는 역할을 했으며, 국왕은 그들에게 신의와 배타성, 끊임없는 동행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임무

미뇽들은 보통 시종관 직책으로 시작해 승진했고, 일부는 대위, 진영장, 연대장(정규군, 보병, 경기병) 등 군사 지휘권을 받아 지방 귀족을 붙들어 두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해당 지역에서 그들은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자리 잡지 못했고, 심한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국가와 경쟁하는 다른 파벌, 특히 국왕의 동생인 무슈(Monsieur)나 기즈 가문으로 귀족이 이탈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신임의 정도에 따라 어떤 총신은 국무회의(군주제의 일상 정치 관리)나 실질적 정치 결정이 내려지는 비밀회의(업무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중요 협상, 기즈 가문과의 대사 역할, 왕과 왕태후 사이 중개, 서신 및 칙령 초안 작성 등 특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최초로 참여한 이는 생뤼크, 조외즈(Joyeuse), 빌리에르(재무회의에도 참여)였고, 도(O)는 왕실 재정을, 에페르논(Épernon)은 1582년 국무위원 겸 업무위원이 되었습니다.

베풀어진 특혜

물론 그들은 기본 직책에서 수입을 얻었지만, 특혜 제도는 신분이나 공식 직책이 아닌 정서적 유대와 충성심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공로에 대한 선물과 하사금이 왕의 총애를 증명했습니다. 이로써 젊은이들은 토지를, 그들의 부모는 지방의 고위 관직을 얻어 지방 권력을 장악하고 정권 반대 세력을 견제했습니다.

지방과의 혼인 동맹을 늘리고, 미뇽들의 공로(그들의 초고속 승진을 입증)에 따라 국왕은 그들에게 훌륭한 혼처를 주선했습니다. 카일뤼, 생술피스, 생메그랭이 그 사례입니다. 이는 다른 신사들과 구별되는 특전이었고, 무슈는 자기 지방 귀족을 빼앗길까 봐 이 혼인들을 방해하려 들었으며, 이로 인해 미뇽들 사이에 결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뇽은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생뤼크와 프랑수아 도만이 총독직과 수도원 수입 덕분에 재정을 관리할 수 있었는데, 그 대가로 국가에 거액을 대여해야 했습니다. 오와 미래의 총리 리슐리외는 변제받지 못해 파산했습니다. 미뇽들은 '보여주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출이 막대했고, 하인과 집사를 둔 저택을 유지하며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했지만, 지방에 기반이 없어 충분한 수입이 없었습니다. 국왕이 가끔 보너스를 주기도 했지만, 그들은 너무 일찍 죽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두 파벌 미뇽들의 경쟁과 유명한 결투

16세기 프랑스 왕들이 총애한 미뇽, 미뇽, 대미뇽의 역사

앞서 본 것처럼 앙리 3세와 동생 무슈 사이에 반복되는 경쟁, 그리고 양측 미뇽들 사이의 끊임없는 알력과 싸움이 1575년부터 1578년 유명한 집단 결투까지 이어지며 미뇽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겨울철 궁정에서의 공존은 견디기 힘들었고, 전쟁에서 돌아오면 폭력 충동이 표출되었습니다. 미뇽들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매일같이 투쟁했습니다. 결투는 일종의 개인적 헌신이었지만, 이 집단 결투는 더 심각했습니다. 미뇽들은 공동체 정신으로 무장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순교자처럼 죽었지만, 명예는 지켜냈습니다.

1578년 1월 한 달간 무슈의 '용사' 뷔시(Bussy)와 왕의 미뇽 그라몽 사이에 괴롭힘이 이어졌습니다. 미뇽들은 그라몽, 생뤼크, 카일뤼, 생메그랭, 마울레옹(Mauléon), 리바로, 모지롱으로 그룹을 꾸렸고, 2월 초 오, 숌베르그 형제, 조외즈가 합류했습니다. 몇 차례 충돌 후 뷔시가 정의를 요구하자 카일뤼가 공식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생뤼크의 결혼식에서 무슈가 불참하며 궁정을 떠난 뒤 사태는 악화되었습니다. 카일뤼와 앙트라게의 새 다툼 끝에, 왕파 3명(카일뤼, 모지롱, 생메그랭)과 무슈파 3명(앙트라게, 리바로, 숌베르그)이 1578년 4월 26일, 생 앙투안 문 앞 말 시장(마르셰 오 슈보)에서 맞붙었습니다. 이날은 '돼지의 날'이라 불렸습니다.

카일뤼, 모지롱, 생메그랭은 성대하게 장례 치러졌습니다. 롱사르가 찬사를 바쳤고, 소네트가 묘비에 새겨졌으며, 미모, 용기, 예의, 명예, 덕목이 칭송되었습니다. 국왕은 이들을 왕국의 고위 관료, 심지어 왕자들에 준해 대우하려 했으며, 생 폴 교회에 대리석 영묘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영묘들은 1589년 1월 설교자들의 선동으로 민중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러한 과도한 예우는 국왕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습니다.

국왕은 낙심하여 크게 변했고, 측근 수를 줄여 단 두 명의 대화 상대에게만 정치적 임무를 맡기려 했습니다. 이로써 젊은 그룹은 막을 내렸고, 라로셸 공방전과 폴란드 행에 동행했던 마지막 총신 수브르, 샤토비외(Châteauvieux), 기슈(Guiche), 보브아-낭지스(Beauvais-Nangis)는 시종관 임명만 받았음에도 '반대 파벌'을 형성해 새롭게 떠오르는 '대미뇽(archi-mignons)' 세력을 견제했습니다.

대미뇽(슈퍼 미뇽)의 등장

16세기 프랑스 왕들이 총애한 미뇽, 미뇽, 대미뇽의 역사

1581년 원로들이 실각한 이후, 왕국은 평화를 맞이했습니다. 1577년부터 국왕은 앙 드 조외즈 다르크(Anne de Joyeuse d'Arques)와 그의 형제 부샤주(Bouchage), 장 루이 드 노가레 드 라 발레트(Jean Louis de Nogaret de La Valette, 에페르논 공작)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프랑수아 도라는 세 명으로 구성된 소수 그룹을 가까이 두었습니다. 국왕은 평온하고 균형 잡힌 건강 상태를 되찾아 귀족들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왕의 사생활을 함께하는 동반자로서 그들은 왕을 어디서든 수행했고, 식사 시중을 들며, 연회와 공식 의식에 동행해 앙리 3세의 사적·공적 삶의 균형을 도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문전박대를 당하는 이들을 막는 방패막이 역할을 했고, 누구든 왕을 알현하려면 그들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들의 임무

왕과 귀족 사이의 중개자로서, 그들은 궁정 직책과 공식 행정 책임, 동일한 군사 지휘권을 겸임해 1기 미뇽들과 달리 불화를 피했습니다. 1582년 나란히 시종장에 임명되어 국왕이 부재중일 때도 왕의 사적 아파트에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권력의 중개자이자 국왕의 집행 대리인으로서, 그들은 가문과 전시 부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국가에 자금을 대여하며, 고객층을 확보하고, 시인·학자·설교에 중요한 성직자들을 후원하고, 반대파(특히 가톨릭 동맹파)의 관직을 매입해 명예를 재분배했습니다.

지방에 그들을 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미뇽들과 마찬가지로 조외즈와 에페르논도 몽모랑시 가문과 나바르 왕 앞에서 고전했는데, 지방에 상주해야 기반을 닦을 수 있지만, 그들의 지위는 국왕에 대한 충성과 상주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입한 인원 중 에페르논은 1584년 12월 서남부 출신으로 '캥쿠앙캉(Quarante-Cinq, 45인 근위대)'을 창설했습니다. 1584년부터 국왕은 불안을 느꼈고, 1586년에는 파리에 국왕 살해 위협 전단지가 나붙었습니다. 45인은 국왕에게 상시 부착되어 왕실 구성원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부대 유지비는 자비로 부담해야 했습니다.

특혜

출신 신분 위에 올려진 대미뇽들의 영지는 공작령-동료령(duchés-pairies)으로 승격되어, 프로테스탄트 세력, 무슈 파, 로렌 가문의 위협에 맞서 귀족을 끌어모았습니다.

대미뇽들을 위한 성대한 혼인도 성사되었습니다. 조외즈는 몽모랑시와 동맹에 맞서 북쪽에서 혼인 동맹을 맺어 국왕의 처남이 되었고, 에페르논은 기즈 가문에 대항해 남쪽에서 프로테스탄트 편을 들기 위해 혼인했습니다. 양측 형제들도 왕을 섬기는 조건으로 좋은 혼처를 얻었습니다. 두 대미뇽 가문은 서로 사돈지간이 되기도 했습니다(에페르논의 형제가 조외즈의 고모와 결혼).

대미뇽의 몰락

16세기 프랑스 왕들이 총애한 미뇽, 미뇽, 대미뇽의 역사

조외즈가 원정을 떠나자 에페르논은 국왕에게 더 다가갔습니다. 1584년부터 나바르, 기즈 가문 관련 신임 임무를 맡으며 입지를 넓혔습니다. 경쟁이 격화되자 조외즈는 1587년 가톨릭 동맹에 접근하는 실수를 저질러 앙리 3세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길은 1587년 9월 쿠트라(Coutras)에서 위그노를 격파하고 개선해 에페르논을 몰아내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9월 20일, 단 3시간 만에 왕군이 대패했고 조외즈는 전사했습니다.

조외즈의 시신은 1588년 3월 파리로 돌아와 참회복 차림의 초상(에피지)이 3일간 전시되었습니다. 장례 만찬에서 초상이 자리에 앉았고, 마지막 날 에페르논과 국왕이 장례 예식을 거행했으며, 이튿날 진혼 미사와 추도사가 이어졌습니다. 조외즈는 '신앙을 위해 죽은 기사, 대순교자'로 추앙되었습니다.

이후 에페르논만 유일한 궁정 신하로 남았고, 조외즈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가 그에게 쏠렸습니다. 그는 거칠 것 없이 행동하며 국왕의 모든 고문을 소외시켰고, 1588년 5월부터 대신들은 '에페르논이 실각한다면 국왕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나섰습니다. 에페르논은 나바르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총신 전성시대의 종언

국왕은 내각을 개편해 어머니가 심어놓은 원로들을 모두 내치고, 에페르논이 밀었던 인물들, 그중에서도 로제 2세 드 벨가르드(Roger II de Bellegarde)라는 마지막 총신을 곁에 두었습니다. 벨가르드는 국왕의 사생활을 돌보며 곁에서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심복이 되었습니다. 1588년 말, 국왕은 관직 분배권을 되찾아 에페르논의 직위를 회수하고 지방 신사들과 화해하려 했으며, 가톨릭 진영에 끌어들일 유일한 장군인 느베르 공작(Duke of Nevers)을 등용하려 했습니다. 느베르가 거부하자 기즈 공작 암살로 이어졌고, 느베르는 1595년 56세로 훌륭한 군인으로서 모든 예우를 받으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더 이상 미뇽도, 대미뇽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앙리 3세의 미뇽들의 형제와 사촌들은 17세기 초 귀족 사회의 기반이 되었고, 국왕의 총애가 옛 명문가를 파리로 불러들여 군복무하게 하고 루이 13세 주변의 진정한 궁정 귀족을 형성했습니다. 1661년 태양왕 루이 14세의 친정 개시와 함께 프랑스의 총신 전성기는 막을 내렸습니다.

참고 문헌

"Le favori du roi, Mignons et courtisans au temps des derniers Valois (vers 1547-vers 1589)" – Nicolas Le Roux

"Fortune de France" – Robert Merle

"La Guerre des trois Henri" – Jean D'Aillon

"La Dame de Monsoreau" et "Les Quarante-Cinq" – Alexandre Du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