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프롱드 전쟁: 의회와 왕자들의 반란 (1648~1653)

프롱드(Fronde)는 어떤 역사가들에 의해 프랑스 혁명의 서막으로 평가받으며, 1648년부터 1653년까지 프랑스에서 왕정의 절대주의 강화에 맞서 일어난 연속된 반란입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여성이 참여해 섭정 안 도트리슈를 겨냥한 귀부인들의 프롱드, 마자랭의 사법·재정 개혁에 맞선 의회의 프롱드, 마자랭이 왕비를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은 왕자들의 프롱드가 뒤섞여 5년간 격렬히 전개되었습니다. 내부 모순으로 막을 내렸지만, 결과적으로 재상의 권력을 강화하고 절대 왕정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귀부인들의 프롱드 (La Fronde des Dames)

처음에는 "허영심 많고 변덕스러운" 몇몇 귀부인들이 정치에 관여한다는 생각에 들떠 시작되었습니다. 광풍이 불듯 롱그빌 공작부인, 슈브뢰즈 공작부인, 몽펜시에르 아가씨, 안 드 공자그 등이 라 로슈푸코와 콩데 같은 남성들을 부추겨, 정부파와 반정부파를 오가며 사태를 극단으로 몰고 갔습니다. 의회는 재상을 상대로 관직 축소, 지대 보호, 재정 횡령을 심판할 정의법원 설치를 요구하며 맞섰습니다.

작은 분쟁으로 끝날 수도 있었으나, 곧 왕국의 모든 귀부인들이 이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마자랭이 스페인 재상 돈 루이스 데 아로에게 프랑스 여인들을 두고 한탄한 말이 생트뵈브에 의해 전해집니다. "착한 아내는 남편과, 요부는 정부와 그날 국가 대사를 논하지 않고는 동침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들은 모든 것을 보고, 알고, 하려 들며, 무엇보다 모든 것을 뒤섞어 놓는다. 롱그빌 공작부인, 슈브뢰즈 공작부인, 팔라틴 공주, 이 세 사람만으로도 바벨탑 이래 없었던 혼란을 겪고 있다."

이렇게 프랑스는 1648년부터 1653년까지 최고위 인사들이 주도하는 연이은 반란을 겪게 됩니다.

의회의 프롱드 (1648~1650)

정부는 섭정(미성년 국왕을 대신함)과 재상 마자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가스통 도를레앙, 콩데, 그리고 콩데의 누이 롱그빌 공작부인은 이탈리아 출신 마자랭의 영향력을 경계하며 권력 진입을 노렸습니다. 공디(훗날 레츠 추기경) 역시 추기경직을 염원했습니다.

마자랭은 30년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 장교 봉급 삭감, 의회 의원 증세, 파리 시민 증세로 지방의 세수 부족을 메우려 했습니다. 귀족과 의회, 왕자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1648년 파리 고등법원, 원조법원, 회계법원이 연합해 국가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3개 기관 대표는 섭정에게 27개 조항의 개혁안을 제출했는데, 징세관(앵탕당) 폐지와 신설 세금에 대한 의회 사전 동의를 핵심으로 했습니다.

프롱드 전쟁: 의회와 왕자들의 반란 (1648~1653)

안 도트리슈는 마자랭의 조언으로 구두 동의했으나 문서 서명은 거부했습니다. 1648년 8월, 파리 시민의 신망이 두터운 의회 지도자 피에르 브루셀을 체포하자 사태는 폭발했습니다. 8월 26일, 파리 시민 10만 명이 무장하고 2,000여 개 바리케이드를 쌓고 쇠사슬을 걸었으며, 아이들 놀이에서 따온 "프롱데르(투석기 당원)"라 자칭했습니다. 마자랭은 이틀 뒤 브루셀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파리의 봉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조정은 9월 뤼유로 피신했고, 콩데가 왕당파에 가담했으며 섭정은 한 달 뒤 개혁안에 서명하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의회는 개혁안 위반을 거듭했고, 마자랭은 파리를 포위해 굶주리게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본에 머물기 불안해진 왕실은 1649년 1월 생제르맹앙레로 은밀히 이동했습니다. 이때 의회는 군 지휘권을 콩데의 동생 콩티 공작에게 맡겼고, 부용 공작, 보포르, 라 모트 원수가 지원했습니다. 공디는 권총을 차고 파리 거리를 누비며 민심을 선동했습니다.

민심은 미래 국왕의 어머니보다는 마자랭에게 향했습니다. 피신처에서 섭정은 권력 회복을 꾀했고, 마자랭은 콩데에게 왕당파 군대를 맡겨 파리를 포위했습니다. 왕군은 파리 남부를 초토화시켰고, 튀렌이 프롱데르 편에 서자 역적죄로 선포되었습니다. 1649년 3월, 의회파는 뤼유 강화조약을 맺어 일부 재정 양보와 사면을 얻었으나, 마자랭이 권좌에 남아 있어 시민과 부르주아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마자랭을 비난하는 팸플릿이 나돌고 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왕자들의 프롱드 (1651~1653)

사태를 수습하려 마자랭은 방돔 가문과 혼인으로 화해시키고 공디에게 추기경직을 약속해 일부 프롱데르를 회유했습니다.

프롱드 전쟁: 의회와 왕자들의 반란 (1648~1653)

1650년 초, 콩데 공작이 마자랭의 기만과 독주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프롱데르 편에 섰으나(마자랭의 자리를 탐냈음), 1월 뱅센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공디가 음모를 꾸며 콩데의 동생 콩티 공작과 매제 롱그빌 공작을 체포하자 본격적인 왕자들의 프롱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방에서 왕자파가 봉기했고, 튀렌 자작도 가세해 뱅센으로 진군했습니다. 마자랭은 포로들을 르아브르로 이송했고, 부르고뉴, 노르망디, 리무쟁, 푸아투, 아키텐 등지에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의회와 구 프롱데르가 왕자파와 연합해 가스통 도를레앙, 프롱데르, 왕자파 지지자 간에 포로 석방과 마자랭 축출을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프롱드 전쟁: 의회와 왕자들의 반란 (1648~1653)

여론과 왕자들을 달래려 섭정은 마자랭이 떠난 척했으나, 실제로는 생제르맹으로 도피했습니다. 안 도트리슈와 어린 국왕이 합류하려 하자 시민들이 1651년 2월 루브르 궁전을 습격해 루이 14세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유명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2월 9~10일 밤). 선택의 여지없이 섭정은 왕자들을 석방했고, 마자랭은 쾰른 선제후령으로 망명해 서신으로 프랑스를 통치했습니다.

튀렌과 부용 공작이 왕당파로 돌아섰습니다. 석방된 콩데는 섭정에게 복수할 일념뿐이었습니다. 보르도를 거점으로 스페인 지원을 받아 파리로 진군했습니다. 섭정은 9월 루이 14세의 성년식을 고대하며 푸아티에로 옮겼습니다. 파리는 의회, 공디, 가스통 도를레앙에게 맡겨졌으나 무질서가 극에 달했습니다. 마자랭 현상금 15만 리브르가 걸렸고, 왕자와 귀족들의 횡포에 지친 루이 14세는 튀렌에게 군대를 맡겨 콩데 토벌에 나섰습니다. 1652년 초 안 도트리슈가 마자랭을 소환해 푸아티에로 합류시켰습니다.

4월, 콩데군과 튀렌군이 격돌했으나 승부 나지 않았고, 각자 파리 입성을 노렸습니다. 그때 가스통 도를레앙의 딸 그랑드 마드무아젤이 개입했습니다. 마자랭이 루이 14세와의 혼인을 거절하자 실망해 반군 편에 선 것입니다. 1652년 7월, 그녀는 생탕투안 문을 열어 콩데군을 들였고, 샤랑통 고지에서 루이 14세와 마자랭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당파를 향해 포격을 가했습니다. 콩데가 파리를 장악했으나 완전한 무정부 상태였고, 기근에 시달린 파리 시민이 왕당파로 돌아서 콩데를 몰아내고 국왕과 협상을 요구했습니다. 마자랭은 벨기에로 떠나야 했고, 콩데는 파리를 떠나 브뤼셀로 가 스페인군에 투신했습니다. 1652년 10월, 루이 14세가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평화의 회복

프롱드 전쟁: 의회와 왕자들의 반란 (1648~1653)

1653년 2월, 파리가 국왕 수중에 들어오자 섭정은 마자랭을 재소환했습니다. 마자랭은 콩데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국왕이 사면했습니다.

기옌 지방 보르도를 제외하고 반란은 진정되었습니다. 8월 왕군이 보르도를 탈환하며 프롱드는 막을 내렸습니다.

콩티 공작은 1653년 7월 국왕 앞에 투항했고, 1654년 마자랭의 조카딸과 결혼했습니다. 1651년 9월 추기경이 된 공디는 뱅센에 투옥되었다 1654년 탈출해 로마로 갔습니다. 롱그빌 공작부인은 실각하지 않고 포르루아얄 수도원의 거물이 되었습니다. 그랑드 마드무아젤은 1652년 10월 추방령을 받아 생파르조 영지로 물러나 회고록을 집필했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군주는 신하도, 의회도 없는 절대 군주가 되고자 했습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귀족들을 모아놓고 감시하며 절대 왕정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참고 문헌

  • 그랑드 마드무아젤 회고록 (안 마리 드 몽펜시에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2008)
  • 프롱드 연대기 (모트빌 부인, 메르퀴르 드 프랑스, 2007)
  • 프롱드 (위베르 메티비에, PUF, 1984)
  • 프랑스사 12권: 리슐리외와 프롱드 (쥘 미슐레,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