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812년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 제국 붕괴의 서막

1812년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 제국 붕괴의 서막

1812년 러시아 원정은 1812년 5월부터 1813년 3월까지 나폴레옹 1세가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이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3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으며, 이는 프랑스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후퇴 과정에서 코사크 기병의 잔혹함과 '겨울 장군'이라 불리는 혹독한 기후가 맞물려 참혹한 비극이 연출됐다. 나폴레옹 전쟁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로 꼽히며, '베레지나'라는 지명은 훗날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뜻하는 관용구가 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왜 러시아 원정이었나?

나폴레옹이 전성기에 오만함(히브리스)에 빠져 무모한 원정을 감행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당시 나폴레옹은 여러 악재에 시달리고 있었고, 러시아 침공은 개인의 변덕이 아닌 절박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1811년, 나폴레옹은 유럽 최강국의 수장이었음에도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상징적으로는 교황청과의 관계가 악화됐고, 군사적으로는 스페인에서 게릴라와 영국군에 발목이 잡혀 정예 부대가 묶여 있었다. 끊임없는 손실은 여론을 악화시켰고, 프랑스 장군들의 패배는 '불패의 제국군' 신화를 깨뜨려 유럽 왕정들에 희망을 안겨줬다. 1809년 오스트리아가 선전포고했을 때 동맹국 러시아는 관망만 했고, 나폴레옹은 홀로 오스트리아를 제압해야 했다.

러시아와의 동맹은 명목뿐이었다. 차르는 1808년 에르푸르트 회담에서 탈레랑의 부추김을 받은 뒤 프랑스와 거리를 뒀다. 군사적으로 무용지물이었을 뿐 아니라, 영국 경제를 봉쇄하려는 대륙 봉쇄령도 러시아에 의해 무시당했다. 통상 역시 원거리와 고율 관세로 미미했고, 나폴레옹이 차르의 여동생과의 혼인을 원했으나 거절당해 마리 루이즈와 혼인해야 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역시 불만이 컸다. 틸지트 조약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 원정은 계속 미뤄졌으며, 프랑스 영향 아래 부활한 바르샤바 공국은 국경의 위협이었다. 올덴부르크 합병으로 발트해를 프랑스가 장악하면서 러시아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다.

1811년 나폴레옹은 차르가 수동적 저항에서 무력 저항으로 돌아설 것이라 판단했다. 다부 원수가 폴란드에서 러시아군의 동향을 보고했고, 나폴레옹은 폴란드가 위협받는다고 보고 병력을 전진 배치했다. 차르는 공격 준비를 중단하고 방어 전략으로 선회했다.

전쟁으로의 행군

러시아의 전쟁 의도가 드러나자, 대륙 봉쇄령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은 나폴레옹은 침공 준비를 서둘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협상이 지연되는 동안 1812년 12만 명의 징병령을 내리고, 전쟁부 지리국에 작전 지도를 제작하게 했다. 1812년 1월부터 유럽 전역의 제국군이 독일로 집결했고, 다부 원수 휘하 15만 명이 폴란드 국경을 지켰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동참 없이는 러시아 편에 설 수 없다고 판단했고, 오스트리아는 1809년 패배 후 아직 전력이 회복되지 않아 저항할 수 없었다. 결국 프로이센은 자국 병력 절반인 2만 명, 오스트리아는 3만 명을 제공하며 프랑스군의 통과를 허용했다. 스웨덴은 베르나도트 국왕이 자국 이익을 위해 반나폴레옹 진영에 합류했고, 러시아는 영국과 연합하며 오스만 제국의 중립도 확보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징병제가 없어 바클레이 드 톨리(12만)와 바그라티온(4만)의 두 야전군만 편성할 수 있었다.

4월 8일 차르는 나폴레옹에게 프로이센과 엘베 강 이서 지역 철수를 최후통첩했고,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빌나에서 군을 지휘했다. 나폴레옹 역시 직접 군을 이끌기로 결단했다.

러시아 원정의 개막

5월 16일 드레스덴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이에른 국왕 등과 회동했다. 혁명의 열기 속에서 '출정가'를 부르며 사기를 돋웠다. 6월 24일, 나폴레옹군은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로 진입했고, 그날 밤 나폴레옹의 말이 토끼에 놀라 그를 떨어뜨리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 제국 붕괴의 서막

나폴레옹은 25만 주력군(주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진격했고, 좌우엔 사위 외젠 드 보아르네(이탈리아·남독일군 9만)와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베스트팔렌군, 독일·폴란드군 7만)가 배치됐다. 초반엔 막을 자가 없어 보였으나 러시아군은 좀처럼 결전을 피하며 후퇴했다. 6월 28일 빌나를 점령했으나 제롬이 바그라티온의 퇴로를 차단하지 못했고, 프랑스 지휘부 내 불화 끝에 제롬은 귀국했다.

광활한 러시아 영토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프랑스군은 약해졌다. 보급선 확보를 위해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고, 국경에서 멀어질수록 보급은 악화됐다. 탈영과 발진티푸스, 이질 등 질병으로 하루 5~6천 명씩 손실이 발생했고, 시체가 길가에 방치돼 공기를 오염시켰다. 초반엔 추위가 아닌 무더위와 밤낮의 기온 차가 병사들을 괴롭혔다. 프로이센의 적대적 민심과 폴란드의 흉작으로 현지 조달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거인들의 충돌: 보로디노 전투

러시아군의 끊임없는 후퇴는 전략적 통찰이라기보다 나폴레옹과의 정면 대결을 두려워한 결과라는 평가(장 튈라르)와, 침공 전부터 후퇴 명령이 인쇄돼 있었다는 전략적 사전 구상설(마리피에르 레이)이 공존한다. 현장 지휘관들도 나폴레옹과의 결전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보급품은 불태우며 후퇴했다. 8월 17일 스몰렌스크에서 저항을 시도했으나 불타버린 도시만 프랑스군에 넘어갔고, 러시아군은 모스크바까지 도망쳤다.

1812년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 제국 붕괴의 서막

바그라티온을 계승한 쿠투조프 원수는 약해지는 먹잇감을 노렸다. 9월 7일, 그는 11만 병력을 8km 전선에 배치하고 서로 엄호하는 요새망, 토루, 참호, 말뚝 함정, 늑대 덫 등 정교한 방어선을 구축해 나폴레옹을 소모전으로 끌어들였다. 새벽 1,227문 포성이 지옥을 토해냈고(초당 평균 3발 포격, 분당 430발 소총 사격), 전투는 극도로 치열하고 불확실했다. 특히 대요새(그레이트 레두트)는 콜랭쿠르가 지휘한 기병대의 필사적 돌격으로 간신히 함락됐으나 그는 전사했다. 나폴레옹은 근위대 투입을 망설이다 보류했고, 러시아군을 궤멸시킬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밤이 되자 러시아군은 4만 5천 명의 사상자와 1천 명의 포로, 20문 대포를 남기고 무질서하게 후퇴했으나, 이를 '승리'로 포장해 '보로디노 전투'라 명명했다. 프랑스 측에선 '모스크바 강 전투'라 부르며, 나폴레옹이 14일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므로 승리를 부정할 수 없다.

나폴레옹은 크렘린 궁에 들어섰고, 베를린과 빈을 점령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강화했듯 모스크바에서도 같은 결말이 오리라 기대했다. 농노 해방으로 농민을 포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토지 재분배는 차르 군대와의 생사 결전을 의미했고, 파리에서 모스크바까지 전령이 15일 걸리는 거리에서 보급 없이 장기전은 불가능했다. 나폴레옹은 전격전과 협상의 사람이지, 점령군 통치자는 아니었다. 모스크바는 잠시 머무는 정거장이자 협상 카드일 뿐이었다.

말할 수 없는 참상: 모스크바 대화재

1812년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 제국 붕괴의 서막

성도 모스크바는 주민이 모두 대피한 텅 빈 도시였다. 갑자기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시내는 폭풍을 타고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소방 펌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로스토프친 총독이 쿠투조프의 지시에 따라 죄수들을 풀어 방화하게 한 것이었다. 병사들은 공포 속에 약탈에 나섰고, 그날 지옥이 모스크바에 내려왔다. 나폴레옹은 무력하게 정복지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불길은 21일까지, 태울 것이 다 타서야 잦아들었다. 방화범들은 처형됐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협상을 기대하며 차르의 답을 기다렸으나 아무 응답도 없었다. 러시아에 발이 묶일까 두려워 10월 19일, 폐허가 된 모스크바에서 철수를 명령했다. 700명의 병자와 부상자를 남겼는데, 코사크 장군 일로바이스키가 이들을 농민들에게 맡겼으나 그들은 군복을 벗기기 위해 학살했다.

러시아에서의 퇴각

퇴각은 이 불운한 원정의 가장 잘 알려진 비극이다. 적대적인 주민, 코사크의 초토화 작전으로 보급은 불가능했다. 10월 예외적으로 따뜻했던 날씨 탓에 방심하던 프랑스군은 여름 복장 그대로 영하 25~30도의 백색 지옥에 내던져졌다.

병사들은 주워 입은 누더기로 버텼다. 노획물을 실은 수레 행렬은 말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자 길가에 버려졌다. 추위에 입술이 붙고 팔다리가 얼어붙어 잠들면 영영 깨지 못했다. 대열에서 낙오한 자들은 코사크의 창에 찔려 죽거나 포로가 됐다. 굶주림은 숭고한 전우애와 추악한 이기심을 동시에 낳았다. 얼어 죽은 말고기를 도끼로 찍어 먹고, 살아있는 말이 쓰러지면 달려들어 뜯어먹었다. 러시아 포로들은 더 비참해 식인 행위까지 벌어졌다. 장교 부인, 종군 여인, 배우자, 매춘부 등 여성들도 이 죽음의 행렬에 섞여 있었다.

스몰렌스크에서 나폴레옹이 비축해둔 식량은 보급 체계 붕괴로 선두 부대인 근위대 위주로만 돌아갔다. 11월 6일, 파리에서 말레 장군이 나폴레옹 사망설을 퍼뜨리며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원로원 위조 명령으로 근위대 1연대까지 동원해 파리 주요 시설을 장악했으나, 위빈 사령관이 간파해 진압됐다. 나폴레옹은 말레의 대담함보다 신하들의 무능과 장교들의 맹목적 복종에 분노했다. 아들의 권위조차 무시당했음을 깨닫고,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고 새 군대를 모아 반격하려 직접 파리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러시아군의 추격과 차단 시도를 뚫고 크라스노에에서 네 원수가 후미를 지키는 등 필사적 저항 끝에 두브롭나에서 기마 가능한 600명으로 '성스러운 중대'를 편성해 황제를 호위했다. 11월 21일, 나폴레옹 휘하엔 2만 4천 명만 남았다.

베레지나: 러시아 원정의 대명사가 된 파국

베레지나 강에 다다랐을 때, 강물은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싣고 흘러 프랑스군의 앞을 막았다. 러시아군에겐 최후의 섬멸 기회였으나, 퐁투니에(도하 공병)들이 얼음장 같은 물속에서 기적 같은 교량을 놓아 5만 병력이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처참했다. 후미 부대가 적을 막는 사이 다리 위선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밟히고 밀려 한 번 미끄러지면 얼음장 밑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1812년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 제국 붕괴의 서막

나폴레옹은 처남 뮈라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콜랭쿠르, 뒤로크, 무통 등과 썰매로 파리로 향했다. 12월 7일부터 18일까지의 도피 행렬 동안 나폴레옹은 목에 독약병을 걸고 다녔으며, 모에 도착했을 땐 일행 전원 돈이 80프랑뿐이라 마차 값을 외상으로 치러야 했다.

뮈라는 무너진 군대를 수습하지 못했고, 네이 원수가 놀라운 투혼으로 잔여 병력을 수습했다. 12월 8일 빌나에서 쿠투조프에게 밀리고 12일 네만 강을 되건넜다. 나폴레옹군 손실은 포로와 탈영병 포함 39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12월 31일 프로이센이 전세를 틈타 반기를 들었고, 나폴레옹의 동맹국들이 차례로 등을 돌려 러시아의 승전 행렬에 동참하려 했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였으나 나폴레옹은 긴급 징병으로 새 군대를 편성해 1813년 독일 전역에서 수적 열세에도 연합군을 연파했다.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할 땐 공격하지 말고 그의 장군들을 상대하라'는 지침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천재일지언정 동시 다발적 전선에 있을 순 없었다.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전략적 천재성의 화려한 백조의 노래를 부르며 퇴위했다.

더 읽어보기

- 부동 자크-올리비에, <나폴레옹과 러시아 원정: 1812>, EXHD, 2021

- 마리피에르 레이, <1812: 러시아 원정사>, 들녘 역사, 2021

- 가니에 자크, <나폴레옹 아틀라스: 나폴레옹의 생애와 전역 126지도>, 나폴레옹 1세 판, 2006

- 레이 마리피에르, <공포의 비극: 러시아 원정 신사>, 플라마리옹,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