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함께 사형 집행을 위한 새로운 기계, 단두대가 등장했습니다. 이 이름은 1789년 교수형 대신 참수형으로 형벌을 대체하자고 제헌의회에 제안한 의원이자 의사인 기요탱 박사(Joseph-Ignace Guillotin)에게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구상해 온 기계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며, 단두대는 1792년 4월 25일 프랑스에서 처음 가동되어 무려 1977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단두대의 기원
혁명 이전 프랑스에는 범죄의 종류와 처형 조건에 따라 다양한 사형 방법이 존재했습니다. 귀족은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으로, 평민은 교수형·화형·바퀴형으로, 국왕 살해범은 능지처참형으로 처형하는 식이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면서 기계적 참수라는 아이디어는 이미 1789년 10월과 12월에 구상되었습니다.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가 제헌의회에서 행한 두 차례의 연설에서 이 개념이 제시되었고, 특히 처형의 신속성 때문에 단두대 사용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는 도끼에 의한 참수나 교수형보다 이 방식이 훨씬 더 '인도적'이라고 믿었습니다.
기요탱 박사와 단두대의 작동 원리
조제프이냐스 기요탱은 1789년 당시 파리의 의사이자 제헌의회 의원이었습니다. 그가 제안한 장치는 높이 4m에 달하는 대형 직선 프레임에 삼각형 칼날을 장착해 사형수의 목을 절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처형이 진행되는 동안 집행인은 시소처럼 4분의 1 회전하는 널판 위로 시신을 밀어냈고, 사형수는 얼굴을 땅으로 향한 채 수평 자세로 고정되었습니다. 목은 반원형 홈이 파인 '유네트(lunette)' 아래쪽 부분에 놓이고, 위쪽 부분이 즉시 내려와 목을 고정합니다. 이후 약 50kg에 달하는 단두대 칼날이 풀려나 곧게 떨어집니다. 기요탱 박사에 따르면 사형수는 "기껏해야 목덜미에 서늘한 숨결이 스치는 듯한 느낌"만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국민 면도기'의 실제 기록
단두대는 혁명 기간 동안 여러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루이제트(Louison)', '루이손(Louisette)', '위대한 국민 면도기', 심지어 '과부(The Widow)'라고도 불렸습니다. 단두대는 1792년 4월 25일 니콜라 자크 펠르티에(Nicolas Jacques Pelletier)의 처형을 시작으로 공식 가동되었으며, 혁명기 내내 막대한 처형을 집행했습니다(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로베스피에르, 당통 등이 이 칼날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귀족과 정치인은 집행인 샤를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의 손에 끝난 사람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이었습니다. 16,000명이 넘는 사형 선고 중 약 60%가 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단두대는 최종적으로 1977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더 읽어볼 자료
- 실방 라뤼(Sylvain Larue), 『영원의 칼날: 단두대의 역사』, 보네통(Bonneton),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