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 역사상 최악의 악녀, 발레리아 메살리나 황후의 짧고 파란만장한 생애

로마 역사상 최악의 악녀, 발레리아 메살리나 황후의 짧고 파란만장한 생애

고대 로마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공화정 시대 로마에서 여성의 이름은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여성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제정 로마 시대부터인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네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 그리고 오늘 소개할 주인공 메살리나일 것입니다.

천 년이 넘는 로마의 긴 역사 속에서도 특히 나쁜 평가를 받고 있는 메살리나의 생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황후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는 폭군이 드물었고, 오직 뛰어난 인물만이 주목받았습니다. 반면 제정 로마에는 네로나 칼리굴라처럼 광기 어린 황제들이 눈에 띄게 등장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황제의 자리가 사실상 세습제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다섯 번째 황제 네로까지의 다섯 황제는 율리우스 가문 또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통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불립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친척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데 집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의 직계 자손들이 잇달아 요절하거나 추방되는 바람에 직계 혈통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남은 혈통은 아그리피나(대 아그리피나)뿐이었고, 그의 아들이 바로 세 번째 황제 칼리굴라였습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불과 4년 만에 국가 재정을 파탄냈고, 결국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다음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의 후손이자, 영웅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며 명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인 클라우디우스였습니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자신보다 35세 어린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의 핏줄을 이은 인물이었습니다.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메살리나입니다.

최악의 황후 메살리나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엇갈립니다. 우유부단한 어리석은 황제라는 설과, 나름 유능했던 황제라는 설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어리석었다는 평가의 근거로는 타고난 말더듬, 인재 등용의 실패,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의 존재를 꼽을 수 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총 네 번 결혼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소 아그리피나)도 클라우디우스의 아내였고, 메살리나 역시 그의 아내였습니다.

로마 역사상 최악의 악녀 두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클라우디우스의 평판이 낮은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황제로서의 능력은 나름 준수한 편이었습니다.

다만 클라우디우스는 아내에게 철저하게 깔보였고, 가족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황제의 아내들은 각종 만찬과 파티를 열곤 했지만, 메살리나의 경우는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로마를 대표하는 모든 역사가들에게 비판받았으며, 메살리나는 아마도 성욕 과잉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녀는 만나는 남자들에게 관계를 강요하며 정사를 거듭했고,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스스로 창부가 되어 창가에서 손님을 맞이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루에 무려 20명의 남자를 상대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황후가 스스로 창가에 서서 손님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세계의 긴 역사 속에서도 메살리나가 유일무이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일본에서도 정예 여직원이 매춘을 반복한 사건이 있었지만, 메살리나는 그에 가까운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캔들일 텐데, 메살리나는 욕심 또한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폭주 위에 폭주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정복 개선식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개선식에 참석한 최초의 로마 여성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권력을 마음껏 이용했습니다.

메살리나는 현대의 쇼핑 중독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고, 낭비벽도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를 메우기 위해 그녀는 남편의 이름을 빌려 간통죄와 반역죄를 남발했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해 낭비했습니다. 돈이 부족해지면 또다시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메살리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그 즉시 모함의 표적이 되었고, 많은 이들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대표적인 희생자로는 훗날 네로의 황후가 되는 포파이아의 어머니와, 두 차례 집정관을 지낸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있습니다.

전자는 황궁의 애용 배우와 얽혔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 후자는 아름다운 정원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내가 이토록 방자하게 굴게 내버려두었다는 점에서, 클라우디우스 역시 일면 폭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메살리나의 최후

메살리나의 폭주는 멈출 줄 몰랐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입니다. 그녀의 폭주에도 마침내 종말이 찾아왔습니다.

결정타는 메살리나가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결혼식을 올린 사건이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실화입니다.

메살리나는 이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도하려다'가 아니라, 실제로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까지 해버린' 것입니다.

칼리굴라의 광기도 경이로웠지만, 메살리나는 그보다 더 심했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게 해 달라"던 마리 앙투아네트도 한숨이 나올 노릇입니다. IQ를 쟀다면 상당히 심각한 수치가 나왔을 것이지만, 이런 행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메살리나는 남편을 만나 변명하려 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조금 떨어진 오스티아에 있었고, 마부는 마차 태우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인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메살리나는 자신의 아이들을 통해 남편에게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연민을 느껴 처형을 취소할지 고민한 듯하지만, 신하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메살리나는 살해당했습니다. 그녀는 아직 스물대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로마에 세워졌던 그녀의 동상은 모두 사라졌고, 황실 묘지에 안치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녀가 잠든 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