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7월 25일, 렌츠부르크 운하 터널이 마침내 문을 열자 지역 주민들은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다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자들은 운하를 건너기 위해 매번 긴 대기 시간과 인내심을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글·크리스찬 울프(Christian Wolf)
킬 운하(Kiel Canal, NOK)는 125년 넘게 북해와 발트해를 잇는 해상 관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인공 수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를 남북으로 가르는 장벽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불편 없이 수로를 통과할 수 있도록 주 전역에 여러 다리가 세워졌고, 렌츠부르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12년 운하 확장 이후, 1895년에 지어진 도로용 선개교는 당대 최신식 이중 선개교로 교체되었습니다. 이 구조물은 렌츠부르크 고가교를 설계한 토목공학자 프리드리히 포스(Friedrich Voß)의 손에서 태어났기에, 마치 고가교의 축소판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다리조차 40년이 채 되지 않아 새로운 대안, 바로 터널이 필요해졌습니다.
교량 개방 때마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교통 체증
운하 터널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우베 슈타인호프(Uwe Steinhoff)입니다. 킬 출신 전직 해군 장교로, 지난 15년간 전국을 돌며 연간 100~150회에 달하는 강연을 이어왔으며, 브레머하펜 독일 해양박물관의 강연 일정조차 이미 예약이 마감될 정도입니다. 그의 강연에는 NOK 아래 4차선 횡단 터널의 건설 과정도 빠지지 않습니다.
"빌핑거(Bilfinger), 홀츠만 AG(Holzmann AG), 호흐티프(Hochtief) 등 여러 건설사가 참여한 초대형 프로젝트였습니다. 운하 터널은 이 지역에 매우 중요한 존재였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해운량뿐 아니라 도로 교통량도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선박이 지나갈 수 있도록 선개교를 하루에도 여러 번 열어야 했습니다. 운전자들은 줄지어 기다려야 했고, 양쪽 방향으로 수 킬로미터에 걸친 교통 체증이 이어졌습니다. 지역 열차마저 그 다리를 건너야 했으니까요." 76세 취미 역사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200미터를 옮겨지고 90도 돌아간 집들, 그리고 철거
운하 터널 건설 계획은 1957년 11월 23일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착공에 앞서 렌츠부르크에 부지를 먼저 확보해야 했습니다. 슈타인호프는 "북쪽 지역에서만 35필지를 매입했고, 6채의 주택을 이전해야 했다. 그중 2채는 200미터 넘게 옮겨진 데다 90도 회전까지 시켜야 했다"고 말합니다. 나머지 주택들은 철거 수순을 밟았습니다.
"그다음, 터널 중앙부를 조립하기 위해 운하 남쪽에 거대한 굴착 구덩이를 파야 했습니다." 터널 중간 구간은 길이 140미터로, 고무 씰로 서로 연결된 7개의 콘크리트 세그먼트로 구성됩니다. 이 덩어리는 훗날 깊이 20미터의 NOK 하저에 가라앉게 됩니다. 문제는 터널 구간이 운하 폭 자체보다 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업자와 굴착기는 만처럼 생긴 형태로 양쪽 제방의 운하 바닥을 먼저 준설해야 했습니다. "터널 양쪽 출입구가 운하 밖에 위치해야 선박이 운하에 진입할 때 방해받지 않는다는 점이 핵심이었다"고 슈타인호프는 덧붙입니다. 결국 인력과 기계를 합쳐 무려 120만 입방미터의 흙이 파냈습니다.
20시간 예정이던 침몰 작업, 70시간이 걸린 사연
터널 중앙부가 완성되면, 이 거대 구조물을 킬 운하 하저까지 내려보내야 했습니다. 양쪽 끝단을 봉쇄하고 물을 채워 실제로 가라앉히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20시간이 배정되었고, 그동안 어떤 선박도 현장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베 슈타인호프에 따르면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길이 140미터 구조물을 균형 있게, 흔들림 없이 낮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그먼트가 비틀리거나 기울어지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기에 엔지니어들은 특수 장비의 도움에 의존했습니다. 게다가 견인 로프가 끊어지면서 잠수부가 이를 다시 연결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며, 예정된 20시간은 거의 70시간으로 늘어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미리 준설해 둔 만은 다시 메워졌고, 가시설 둑이 설치되었습니다. "이제 작업자들이 터널 입구 끝단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깊이 20미터만 더 파내면 됐고, 길이 250미터 중앙부로 이어지는 접근도로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렌츠부르크 운하 터널을 지나는 운전자들은 빗물을 막아 주는 대형 그레이팅 위를 지날 때 그 흔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개통식에 몰려든 약 8만 명의 축제 인파
공사에 쓰인 거대한 굴착 구덩이는 공사 후 일부만 되메워졌습니다. "오스테룐펠트(Osterrönfeld) 야외 수영장이 바로 그 발굴 부지의 일부이기 때문에 전부 메울 수는 없었다"고 슈타인호프는 말합니다. 그리고 1961년 7월 25일,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운하 터널이 공식 개통된 것입니다. 축하 행사는 곧장 대규모 축제로 변했고, 모두가 이 초대형 프로젝트를 한눈에 담고 싶어 했습니다. 약 8만 명의 인파가 렌츠부르크로 몰려들었습니다. 개통 신호는 당시 연방 교통부 장관 크리스토프 제보름(Christoph Seebohm),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경제부 장관 헤르만 뵈른젠(Hermann Böhrnsen), 덴마크 교통부 장관 카이 린드베르그(Kai Lindberg)가 함께 맡았습니다. "하지만 차량이 마침내 운하 아래 4개 차선을 달릴 수 있기 전에, 사람들은 먼저 터널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걸어서 건넜습니다"라고 전직 해군 장교는 회상합니다.
1990년대, 첫 번째 대규모 보수 공사
운하 터널은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개보수에 들어갑니다. 무엇보다 킬 운하 하저 구조물 벽면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 문제였다고 슈타인호프는 전합니다. 철근콘크리트와 물의 조합,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철근 부식 때문에 콘크리트 벽체 일부가 문자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해당 부위에 녹 방지 처리를 한 뒤 콘크리트로 다시 밀봉했습니다. "당시 화재 안전 규정이 변경되면서 터널 내부에 방화 패널도 설치했다"고 슈타인호프는 설명합니다. 그리고 20년 후, 두 번째 보수가 필요해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큰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당국은 부식 피해가 두 배로 늘었으리라 가정하고 그에 맞춰 입찰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터널은 실제로 폐쇄한 뒤 사전에 전면 조사를 거쳐야 했습니다."
수년간의 지연과 공사비 폭증
방화 패널을 떼어낸 결과, 터널 전체가 양쪽 면에서 심각하게 손상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기록 자료의 부재로 추가 재생 대상 지점 파악도 더디어졌고, 현행 안전 규정 역시 공정 지연의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2011년 시작된 개보수 공사는 2014년 완공이 목표였지만, 처음 예상한 3년이 아니라 결국 10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 보니 초기 투입 예정이었던 2,500만 유로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최종적으로 9,000만 유로가 지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올해 5월, 60세 생일을 앞둔 좋은 시점에 킬 운하 아래 4개 차선에 차량 통행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지역 경제계와 정치권, 그리고 통근자들 사이의 안도감은 그만큼 컸습니다. 이는 60년의 세월이 흘러도 운하 터널이 이 지역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