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시위 운동에서 주류 정당으로: 독일 녹색당 창당 40년의 굴곡진 여정

1980년 1월 12일과 13일, 카를스루에에서 열린 연방 녹색당 창립 당대회에는 1,000명의 대표가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서로 다른 사회운동 출신 인사들이 한데 모였고,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바로 '시위'였습니다.

글: 제니퍼 랑(Jennifer Lange)

그러나 과연 반핵 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 등 각기 다른 운동권 출신들이 하나의 정당 조직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을까요? 1980년 1월 13일, 함부르크 출신 토마스 에버만(Thomas Ebermann)은 연방 차원의 녹색당 공식 창당이 결정된 자리에서 그 순간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낙태 반대론자와 옹호론자의 격론

1982년, '녹색 대안 명단(Green Alternative List)'은 함부르크 의회에 진출했으며, 토마스 에버만은 당시 이들의 대변인이었습니다.

창당 40주년을 맞아 에버만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 같은 사람의 참여가 허용될지 확신할 수 없어 긴장되었다." 카를스루에에서는 보수 진영과 좌파 진영이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낙태를 반대하는가, 지지하는가.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할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새 정당에서 어떤 흐름이 발언권을 가져야 하는가.

공산주의자였던 에버만 자신은 함부르크의 '다채로운 명단(Colorful List)' 소속이었습니다. 그는 "이 명단은 좌파, 대안세력, 자본주의 비판 세력 등 함부르크의 거의 모든 것을 한데 모은 것에 가까웠다"며 "반핵 운동가, 무허가 거주자, 감옥 제도 비판자, 여성운동가, 교통정책 비판 세력이 함께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북부 독일 전역에는 환경보호 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기존 모든 정당에 반대하는 정당'

에버만은 회상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도 않았고, 끊임없이 다퉜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존 정당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반(反)정당'을 형성하고 있다는 감각은 분명했다." 결국 카를스루에에서 합의에 도달했고, 모든 핵심 쟁점에서 좌파 세력이 보수 세력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정당 체제의 새로운 세력으로

녹색당의 창당으로 1950년대 이후 폐쇄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구서독(연방공화국)의 정당 체제에 처음으로 새로운 세력이 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녹색당은 기본 강령에서 스스로를 "생태주의적, 사회적, 풀뿌리 민주주의적, 비폭력주의적" 정당으로 규정했습니다.

1983년, 첫 연방의회 진입

1980년 총선에서 녹색당은 1.5%의 득표율로 연방의회 진입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983년 조기 총선에서 5.6%의 득표율로 첫 의석을 확보하며 연방의회에 입성했고, 도발적인 정치 스타일과 화려한 니트 스웨터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계 속의 모래가 되고 싶었다"

에버만에 따르면 당시 녹색당은 국가 기계에 '모래'를 뿌리려 했습니다. 즉, 기존 질서를 흔드는 파괴적 요소였던 것입니다. 또한 당내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도 엄격한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다수결을 따른다. 숙련공 임금 수준의 보수만 받는다. 누구도 정치를 통해 부자가 되거나 잘살 수 없다." 1980년대 초 녹색당 활동에서 공직 로테이션 원칙 역시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에버만은 "영원히 자리를 지키며 대체 불가능한 '위인'은 원하지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반당(反黨)에서 부르주아화까지

그러나 수년에 걸쳐 녹색당은 크게 변모했습니다. 괴팅겐 출신 정치학자 미하엘 뤼만(Michael Lühmann)은 1980년대가 갈등의 시대였으며, 1989~90년 전환기와 독일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당내 '형성 과정'이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급진 좌파는 무너져 나갔고, 남은 것은 "기본적으로 통치와 참여를 지향하는 부르주아 정당, 즉 부르주아화된 정당"이라고 뤼만은 진단합니다.

평화운동가와 전쟁 지지자의 분열

급진 좌파였던 에버만 역시 이 시기에 당을 떠났습니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이 정권과 지나치게 가까워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 같은 '실무형 정치인'들이 주도권을 쥐었고, 녹색당은 주정부와 연방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았으며, 분쟁 지역에서의 독일 연방군 작전에도 동의했습니다.

1999년 코소보 전쟁 관련 특별 당대회에서 녹색당 의원들은 "올리브 그린이 아닌 동맹(Alliance) 그린, 우리 평화정책의 뿌리로 돌아가자"고 요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슈카 피셔는 페인트 봉지에 맞기도 했습니다. 피셔는 연설에서 "이 문제는 구호나 페인트 봉지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녹색당이 경찰의 보호 아래 당대회를 열어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창당 40년, 녹색당은 그 어느 때보다 성공적

오늘날 토마스 에버만은 1980년 자신이 창당에 참여했던 정당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녹색당은 철저하게 순응적인 정당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럼에도 창당 40년이 지난 지금 녹색당은 그 어느 때보다 성공적인 정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경우에 따라 여론조사 지지율이 20%를 훨씬 웃돌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