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20일, 함부르크의 나치 정권은 체계적인 강제 추방을 개시했습니다. 신티족과 로마니족에 이어 곧 유대인들이 동유럽으로 끌려갔고, 살아남은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글: 디르크 헴펠(Dirk Hempel)
80년 전, 폴란드 침공과 점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약 9개월이 지난 1940년 5월 20일, 함부르크에서 신티족과 로마니족, 그리고 곧바로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체계적인 추방이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수년간 이들은 전국의 나치 당국에 의해 등록되고 권리를 박탈당하며 박해받아 왔습니다. 이제 '친위대 전국지도자 겸 독일 경찰총장'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의 명령에 따라 이들은 동쪽으로 이송되었고, 재산은 약탈당했으며, 노동력은 착취당하게 됩니다.
신티·로마니족부터 시작된 추방
1940년부터 1945년 사이, 함부르크와 독일 북부 출신 유대인·로마니·신티 7,000명 이상이 함부르크의 하노버역(Hannoverscher Bahnhof)을 거쳐 죽음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나흘 전, 형사경찰은 함부르크, 브레멘, 킬, 플렌스부르크 및 독일 북부 여러 도시에서 남녀노소 900명이 넘는 신티족과 로마니족을 체포했습니다. 이들은 트럭과 버스에 실려 함부르크 항구로 옮겨져 과실창고 C(Fruchtschuppen C)에 갇혔고, 그곳에서 신원이 등록되고 서류와 귀중품을 강탈당했습니다. 이후 경찰은 이들을 인근의 도시 중앙 화물역인 하노버역으로 압송했습니다. 승강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조차 강제노동에 동원되다
1942년의 기록에는 폴란드 벨제츠(Bełżec)에서 벌어진 대량 총살 사건이 남아 있습니다.
신티족과 로마니족은 과밀한 화물 열차에 실려 폴란드 벨제츠의 강제수용소까지 사흘을 이동해야 했습니다. 1940년 여름 내내 어린아이들까지 이곳에서 가장 힘든 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은 소련 국경 방어를 위한 대전차 참호를 팠습니다. 식량 부족, 깨끗한 물 부재, 의사 없는 환경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생존자들은 이후 크리효(Krychów) 수용소로 옮겨져 늪지 배수 작업과 부크(Bug)강 수로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다음 해 SS는 수감자들을 여러 게토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했고,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1941년 10월, 유대인 추방이 본격화되다
폴란드 우치(Łódź) 게토에서는 수천 명의 추방된 유대인들이 독일군과 민간기업을 위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함부르크 하노버역에서의 이송은 1941년 10월 25일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나치 당국이 유대인 1,034명을 폴란드 우치 게토로 이송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 함부르크 주정부와 시정부의 수장이었던 나치 관구지도자 카를 오토 카우프만(Karl Otto Kaufmann)은 히틀러에게 직접 이송을 탄원한 인물입니다. 그는 최근 대규모 폭격으로 집을 잃은 다른 함부르크 시민들에게 이들의 주택을 배분하고자 했습니다. 우치 게토의 추방민들은 비참한 삶을 견뎌야 했습니다. 수천 명이 이곳에서 독일군과 민간기업을 위해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그 후 몇 년 동안 우치 게토 출신 20만 명이 인근 헤움노(Chełmno) 수용소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했습니다.
1941년 10월, 나치 정권은 독일의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체계적으로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폴란드와 소련 점령지의 게토와 강제수용소로, 이후에는 절멸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42년부터는 독일철도국(Reichsbahn)의 수송 열차가 마이다네크(Majdanek), 소비보르(Sobibór), 아우슈비츠(Auschwitz)까지 직행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동부에서 학살당한 수많은 함부르크 시민들
1941년 11월, 유대인 1,955명이 두 대의 수송열차에 실려 함부르크에서 민스크로 이송되어 수용소 강제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이들 다수는 1943년 5월과 9월에 총살되거나 배기가스를 채운 트럭 안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초, 나치 당국은 함부르크, 뤼네부르크, 뤼베크의 유대인 753명을 라트비아 수도 리가로 이송했습니다. 그중에는 함부르크 수석 랍비 조셉 카를레바흐(Joseph Carlebach) 박사와 그의 아내, 세 딸도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카를레바흐는 은밀히 학교 수업을 조직하고 종교적 위로를 제공했지만, 1942년 봄 그와 가족은 인근 숲에서 총살당했습니다.
나치 당국은 또다른 함부르크 신티·로마니족들을 두 차례 더 동쪽으로 추방했습니다. 목적지는 나치의 언어로 '집시 수용소'라 불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일부였고, 이들 대부분은 그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항의 대신 박수를 보낸 함부르크
오늘날 함부르크 그린델피어텔의 요제프-카를레바흐-광장(Joseph-Carlebach-Platz)은 1942년 리가에서 수석 랍비가 살해당한 것을 기리고 있습니다.
1945년까지 나치 당국은 수천 명을 함부르크에서 추방했으며, 18대의 열차가 하노버역에서 중부 및 동유럽의 게토와 수용소로 향했습니다. 추방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함부르크 시민들의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집결지는 도심, 특히 그린델피어텔(담토르역의 로겐하우스, 유대인 공동체 센터—오늘날의 함부르거 카머슈필레, 탈무드 토라 학교 등)에 있었습니다. 충격을 받고 고개를 돌린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 상인들은 초기 수송 때 익명으로 음식을 기부했지만, 어떤 조직적인 항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함부르크 시민들은 이웃 시민들의 납치를 환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화물창고로 향하는 트럭에 오르내려야 할 때 박수가 터져 나왔고, "떠나서 다행이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공개 경매에서는 수만 명이 추방민들의 재산에 입찰을 했습니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강제 이송
신티·로마니·유대인 수송열차만이 함부르크 화물역을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이곳에서 정치적 반대자들도 도시에서 추방했습니다. 1942년과 1943년, 정권은 이전에 감옥이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1,000명이 넘는 함부르크 시민을 국방군 처벌부대와 보호감호 구역으로 강제 보냈습니다. 이들은 소련, 발칸 반도, 아프리카의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고 지뢰 제거 같은 극도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들 중 5분의 4가 사망했습니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 하노버역에서 추방된 유대인·신티·로마니 최소 8,071명 중 생존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수송열차는 전쟁이 끝나기 불과 몇 주 전인 1945년 2월 14일에 이 한자 도시를 떠났습니다.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다
추방에 연루된 함부르크 행정부의 관리들—재정 관료, 주택 당국 관리, 제국청, 경찰, 형사경찰—은 결코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나치 정권 붕괴 이후에도 계속 직위에 머물렀습니다.
오늘날의 기억 장소
하노버역은 1955년에 철거되었고 승강장의 일부만 보존되었습니다. 오늘날 그 자리에는 하펜시티(Hafencity)의 로제공원(Lohsepark)이 들어섰습니다. 2017년부터 '덴크말 하노버역(denk.mal Hannoverscher Bahnhof)' 추모관이 강제 추방 희생자들을 기려 왔으며, 문서센터는 2023년 문을 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