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수프를 불지 않으면 왕도 죽는다? 수메르 왕명록의 기묘한 실화

전설과 신화가 뒤섞인 왕들의 명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남긴 가장 흥미로운 문서 중 하나가 바로 수메르 왕명록(Sumerian Royal List)입니다. 이 문서에는 왕조와 도시별로 분류된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태고의 시절부터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 사이를 다스렸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전해진다'고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명부에 오른 군주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그룹은 순전히 전설에 불과한 왕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비정상적으로 긴 재위 기간입니다. 백 년에 달하는 경우는 물론, 바드티비라의 엔멘루아나(Enmenluana)처럼 무려 43,000년을 통치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이들은 후대에 창작된 허구의 인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요? 고대 수메르에서 통치자는 원래 민회에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고 자신의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시작하면서, 정당성을 뒷받침할 명분이 필요해졌습니다. 전설적이거나 신적인 인물의 후손임을 내세우면 반대파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체면도 서니까요.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조차 자신을 아킬레우스의 후손이라 칭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요즘 일부 음모론 사이트에서는 이 왕들이 실존했으며, 외계인이나 아틀란티스인, 혹은 마블 슈퍼히어로들의 조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래 살았던 존재들이 남긴 유전적·신체적 흔적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논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겠습니다. 누구나 산타 클로스를 믿을 자유는 있으니까요. 물론 그 정체는... 스포일러 주의... 부모님이지만요!

수프를 불지 않으면 왕도 죽는다? 수메르 왕명록의 기묘한 실화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는 왕들

두 번째 그룹은 규모는 작지만 실존했을 개연성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다만 기록된 모습 그대로였을 리는 없습니다. 시간이 덧씌운 전설의 베일을 걷어내야 진짜 모습이 보이는 군주들입니다. 대표적으로 같은 도시 출신인 우루크의 길가메시(Gilgamesh)와 엔메르카르(Enmerkar)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실존했을 수는 있지만, 기록만큼 많은 여인과 어울리지도, 화려한 모험을 즐기지도, 그렇게 잘생기고 컸지도 않았을 겁니다. 앙젤리나 졸리가 연락처를 건넸을 리도 없고요.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는 왕들

세 번째 그룹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고고학자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집단입니다. 이들은 실존의 물증, 즉 이 세상을 지나갔다는 물리적 증거가 발굴된 왕들입니다. 재위 기간도 훨씬 현실적입니다. 아카드의 사르곤(Sargon)의 56년 재위부터 아카드 왕조 마지막 군주들의 며칠에 불과한 짧은 통치까지 다양합니다. 말하자면 인생 그 자체인 셈이죠. 어떤 이는 침상에서 편히 생을 마감하고, 어떤 이는 하인과 날카로운 칼날 앞에서 자리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정통성 없이 왕위에 오른 에라이미티

이 그룹 중 이신 왕조의 왕들 가운데 특별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바로 에라이미티(Erra-imitti)입니다. 이신(Isin) 유적은 현재 이라크 디와니야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수메르 시대에는 유명한 성읍 니푸르(Nippur)에서 약 30km 거리에 있었습니다.

니푸르는 모든 도시가 탐내는 최고의 상품이었습니다. 그곳의 엔릴(Enlil) 신역이 바로 왕권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신은 우르 제3왕조 말기에 독립하여 기원전 2000년경 자체 왕조를 세웠습니다. 나름 선전을 펼쳤지만, 늘 라르사(Larsa)와 니푸르를 비롯한 주변 도시들의 지배권을 놓고 거의 영구적인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에라이미티는 단 5년 만에 니푸르를 상실한 리핏엔릴(Lipit-Enlil)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 왕과 혈족이 아니었고, 리핏엔릴이 전사했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강제 은퇴 서류에 서명하게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에라이미티였다는 의심이 듭니다. 발견된 일부 문서로 미루어 그는 장군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전략가로서 실패작이었던 리핏엔릴을 몰아냈다면 충분히 설명이 되는 대목입니다.

새해 제의가 알린 흉조

어쨌든 에라이미티는 8년간 재위를 유지했습니다. 니푸르를 일시적으로 되찾았고, 키수라(Kisurra) 같은 다른 도시들도 손에 넣었습니다. 군사적 능력도 나쁘지 않았고, 신전에 대한 기부를 기록한 문서들도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의 워털루는 재위 8년째 되는 해의 새해 축제에서 찾아왔습니다.

축제 초에 거행된 첫 제사에서 흉조가 나온 것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제물 동물들은 끊임없이 나쁜 예언만 전했습니다. 이에 에라이미티는 수메르 통치자들이 때때로 사용하던 묘책에 의지하기로 합니다. 바로 대역 왕을 세워 불행을 떠안게 하고, 자신은 '일시적으로' 퇴위하는 것이었습니다. 흉기를 짊어질 사람으로 선택된 이는 엔릴바니(Enlilbani)라는 이름의 정원사였습니다. 그는 해당 의식을 모두 갖춰 임시 군주로 즉위했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수메르의 신들은 복수심 많고 고집이 셉니다. 두 강 지역의 속담이 이렇게 말하듯이: "바보는 신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뜨거운 수프가 가져온 최후

엔릴바니가 의식 중 하나에 참여하고 있던 동안, 에라이미티는 맛있는 귀리 수프 한 그릇을 음미하러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수프가 너무 뜨거워 입안을 크게 데였고,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가 기이하게 들리지만, 실제로 수메르 왕명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물론 수프 레시피까지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엔릴바니는 무려 24년간 왕위를 유지했습니다. 게다가 별로 잘못한 일도 없어 보입니다. 라르사를 혼내주고, 이신의 성벽을 재건했으며, 새 궁전과 여러 공공사업을 추진했으니까요.

수프를 불지 않으면 왕도 죽는다? 수메르 왕명록의 기묘한 실화

신의 뜻에서는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옛 어른들의 지혜를 더 좋아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할머니께서 수프는 꼭 불어 먹으라고 하셨던 것이 옳았다는 것, 그리고 태초 이래 수많은 무능한 통치자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현명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행운의 별 아래 태어난 정원사 한 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글: 조슈아 베드위R(Joshua BedwyR), 『In a Dark Blue World』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