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벤허의 갤리선 노예는 허구? 악티움 해전으로 보는 고대 로마 해군의 실상

악티움(Actium) 해전은 전술적 규모만 놓고 보면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대규모 해전이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시칠리아 반란 관련 전투만큼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악티움 해전은 바다에서 싸우던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이 전투로 우리가 오늘날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막을 내렸고, 새로운 전술과 새로운 유형의 선박이 그때까지 고대 지중해 전역에서 통용되던 기존 함선들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거대한 갤리선 전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이에 얽힌 많은 통념은 사실과 다릅니다. 우리는 돛이 바람에 부풀어 올랐거나 쇠사슬에 묶인 갤리선 노예들의 노력으로 움직이는 삼단선(trireme)과 오단선(quinquereme) 사이의 전투를 떠올립니다. 서로를 향해 진격하고, 추격하고, 갑판 포병이 소이 발사체를 쏘아 올리고, 청동 박차로 충돌하다 가라앉는 장면까지 말입니다.

벤허가 그린 갤리선,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벤허의 갤리선 노예는 허구? 악티움 해전으로 보는 고대 로마 해군의 실상

빠르고 가벼운 이단선(bireme)부터 두 개의 돛대와 포탑, 열 개의 노를 갖춘 떠다니는 요새 같은 거함 데케레스(deceres)까지, 로마 해군의 모든 선박은 평시에는 자유민과 조종 임무를 맡은 군인, 항해 및 보조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이 저었습니다. 항해는 항해 담당자의 문제였고, 포병은 포병대의 문제였으며, 갑판 전투는 또 다른 전문 부대의 몫이었습니다. 배나 노에 쇠사슬로 묶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갤리선 노예'라는 이미지는 중세 후기 혹은 근세, 즉 이교도 세력이 그리스도교 연안에서 강제 징집을 벌이던 레판토 전투 시기의 갤리선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하나 흔히 저지르는 오해는 함선들이 돛대와 돛을 모두 갖춘 채 전투에 나섰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돛대와 돛, 심지어 선수 돛대의 작은 아르테몬(artemon)조차 전투 직전 해안에 남겨두었습니다. 기동 중인 적함과 얽히거나 적 궁수들의 불붙은 화살 표적이 되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배들이 날카로운 청동 박차로 충돌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널리 쓰인 전술은 페리플로스(periplos)였습니다. 무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모든 발사체를 적함에 쏟아붓고, 승선할 기회가 생길 때까지 원형 회전을 반복하는 전법입니다. 카르타고인들이 바다에서 싸우던 방식이었고, 킬리키아 해적들도 그렇게 했으며,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만나기 전까지 시칠리아에서 거둔 성공도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배고픔보다 더 영리했던 아그리파는 덫에 걸린 참치처럼 이단선과 삼단선을 사냥하는 일종의 접이식 작살 무기를 설계했습니다.

벤허의 갤리선 노예는 허구? 악티움 해전으로 보는 고대 로마 해군의 실상

마지막으로 불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불을 던지는 쪽에게도 맞는 쪽에게도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군이 불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함선을 불태운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편대와 그녀가 가지고 나온 전쟁 보물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습니다. 적의 함선을 온전히 확보하느냐 마느냐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암브라키아 만 좁은 입구의 폭풍 몰아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운용 가능한 200여 척의 배를 편성해 해협 주위에 호 모양으로 전개하고, 후방에는 이집트 분대와 수송선대를 배치했습니다. 전열은 세 개 집단으로 나뉘어 좌익은 가이우스 소시우스, 중앙은 마르쿠스 인스타에이오, 우익은 겔리우스 푸블리콜라가 지휘하고 안토니우스 자신이 총지휘를 맡았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있었습니다. 숫자는 약간 더 많았지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무거운 5단선·6단선·8단선·10단선과 달리 거의 전부 이단선과 삼단선으로 구성된 경량 함대였습니다. 좌익은 마르쿠스 루리우스, 중앙은 루키우스 아룬티우스가 맡았고, 우익에서 전투를 지휘한 것은 마르쿠스 아그리파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를 섬긴 진정한 군사적 재능이었고, 그 뒤에서 젊은 카이사르가 전체를 감독했습니다.

벤허의 갤리선 노예는 허구? 악티움 해전으로 보는 고대 로마 해군의 실상

몇 시간 동안 정박한 채 짧은 소나기를 견디고 오지 않는 명령을 기다리던 끝에, 먼저 움직인 것은 안토니우스의 전열이었습니다. 그의 우익과 인스타에이오의 중앙이 북서쪽으로 밀고 나가 옥타비아누스의 전열에 틈을 내려 했습니다. 전투는 그 측면에서 시작되어 곧 치열해졌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기다리던 자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정오가 지난 뒤였습니다. 바람이 남동쪽으로 바뀐 것입니다. 펠로폰네소스반도로 항해하기에 유리한 방향이었죠. 여왕의 계획에 따르면, 함대가 바람의 변화를 알리는 즉시 닻을 올리는 것이 진짜 작전이었습니다. 순풍이 하늘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미 감옥이 된 암브라키아 만에서 신속하게 탈출하는 것 말입니다.

안토니우스 우익의 움직임으로 옥타비아누스 전열의 중앙이 무너졌고, 약 2마일에 달는 틈이 벌어져 클레오파트라는 재빨리 전속력으로 그 틈새를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아그리파의 경량 함선들이 주도권을 쥔 측면에 갇혀, 페리플로스 전법으로 그의 중형 선단을 가차 없이 괴롭혔습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배를 옮겨타고 뒤처지는 배들을 따라 여왕을 쫓아야 했습니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마르쿠스 인스타에이오는 만 입구에 남아 본격적인 탈출을 전투인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어떻게 돛대를 올리고 '전투'에 나섰는지 설명합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정신이 온전한 고대 항해자 중 누구도 돛대와 돛을 세운 채 전투 대형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전투 직전 충성을 바꾼 안토니우스의 특사이자 최측근 중 한 명인 퀸투스 델리우스의 고발 덕분에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악티움 해전의 결과는 이 특이한 커플에게 처참했습니다. 가이우스 소시우스는 싸우지 않고 좌익을 항복시켰고, 아마도 옥타비아누스와 밀약을 맺고 있었을 것입니다. 겔리우스와 인스타에이오에 대해 더 알려진 것은 없는데, 안토니우스의 탈출을 엄호하다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본토에서 가장 신뢰받던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19개 군단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시킨 뒤, 전투 당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이집트로 도망쳤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전쟁 자금과 약 70척의 배를 건졌지만, 베테랑 정규군도 없었고 옥타비아누스를 막을 무엇도 남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들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공두정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로마의 숙적(Archenemies de Roma)' 작가 가브리엘 카스텔료(Gabriel Castelló) 협업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