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탈라타! 탈라타!'… 에우크시노스(흑해)를 향한 만인 부대의 마지막 전투

 탈라타! 탈라타! … 에우크시노스(흑해)를 향한 만인 부대의 마지막 전투

기원전 400년 1월. 만인(萬人) 부대는 이미 9개월간의 행군과 전투를 마친 뒤였다. 그들은 기원전 401년 3월 사르디스에서 출발해 이제 이오니아 해안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직 칼리비아인과 타오키아인의 땅을 통과해 흑해 연안에 도달해야 했다.

소나무 숲 속의 기지

그들이 산악 지형인 타오키아인의 나라에 들어서자 또다시 좁은 협곡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적들은 봉우리를 장악한 채, 폭이 겨우 15미터밖에 되지 않는 협로를 지나려는 자들을 향해 거석을 굴려 내리며 막아섰다.

이에 그리스군은 적의 '탄약'을 고갈시키기 위한 기교를 발휘했다. 일부 병사들이 협곡 바로 옆의 소나무 숲에 들어가 통과하려는 척하자, 적들은 끊임없이 돌을 던졌다. 그리스군은 큰 소나무들 뒤로 몸을 숨겼고, 마침내 돌이 바닥난 적진을 향해 돌격해 진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타오키아인들에게 포로가 될 생각은 없었다. 여자와 남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절벽 위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 한 명을 막으려던 스팀팔로스의 아이네아스도 그와 함께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살아 붙잡힌 타오키아인은 극소수였고, 대신 수많은 황소와 양과 송아지가 그리스군의 손에 넘어왔다.

승리 후 그리스군은 제철업으로 명성이 높았던 칼리브스족의 땅을 행군했다. 그들은 요새화된 도시에 살면서 그리스군이 식량을 약탈하지 못하게 했지만, 다행히 타오키아인에게서 빼앗은 가축 덕분에 군대의 먹거리 걱정은 없었다. 칼리브스의 땅을 지나 군대는 아르파 강(오늘날의 아르파차이)을 건너, 오늘날 터키와 조지아 국경 지역에 해당하는 스키티니족의 나라로 들어갔다.

'바다다! 바다다!'

스키티니족은 그리스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식량과 안내자를 제공했다. 김니아스(오늘날 에르주룸으로 추정)의 지배관은 5일 행군 뒤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는 안내자를 보냈고, 약속을 어기면 자기 목이 잘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 안내자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그리스인들을 스키티니족에게 적대적인 나라로 인도하며 마음껏 불태우고 약탈하라고 했다. 스키티니족이 그들을 도운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스인의 '활용'으로 자기네 적들을 응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행군 5일째 되는 날, 선봉대 병사들은 티케스산(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에 따르면 키니온이라 불림) 정상에서 바다를 마주 보았다. 병사들은 울부짖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그 유명한 외침, '탈라타! 탈라타!'(바다여! 바다여!)를 질렀다.

함성을 들은 뒤방위대는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 채 적의 매복을 의심해 서둘러 산에 올랐다. 스키티니족의 적들이 이미 그리스 팔랑크스를 괴롭히고 있었고 작은 충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 바다를 확인한 뒤방위대 병사들과 장군들, 대장들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행군과 그때까지의 전투와 승리를 기념하는 표지로 돌무더기를 쌓기로 결정했다.

그리스인들은 안내자에게 후한 보상을 내렸다. 금화 10닢과 준마 한 필, 옷과 은주머니, 그리고 반지 여러 개였다. 그는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정착할 수 있는 마을을 가리켜 주었고, 그리스 도시 트라페주스(트레비즌드) 남쪽의 마크로네스족 땅에 이르는 길에 대한 정보도 전해 주었다.

마크로네스와 콜키스의 땅에서

그리스군은 또 55킬로미터를 행군해 마크로네스족의 땅에 들어섰다. 여기서도 험준한 지형과의 씨름이 이어졌다. 오른쪽으로는 산맥이 펼쳐져 있었고 왼쪽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강이 흘렀다. 바로 앞에는 크지 않지만 빽빽한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스군은 어쩔 수 없이 나무를 베어 길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크로네스족은 숲 출구에 진을 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멀리서 돌을 던졌지만 거리가 멀어 그리스인들에게 닿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은 마크로네스어를 안다고 주장하는 한 병사, 해방 노예 출신이 크세노폰 앞에 나섰다. 크세노폰은 즉시 그 병사와 함께 마크로네스족에게 다가가 왜 그들을 공격하려 하는지 물었다. 마크로네스족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침입했으므로 나라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했다.

크세노폰은 통역병을 통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스인들은 그저 그들의 나라를 통과하고 싶을 뿐이며 악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 싸웠고, 이제 자신들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설명 끝에 마크로네스족과 그리스인은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마크로네스족은 그리스인들이 숲속에 길을 여는 것을 도와주고 식량도 팔아주었다. 3일 만에 작업이 끝났고 그리스군은 콜키스족의 땅을 향해 진군했다. 국경 지점에서 그들은 이미 전열을 갖추고, 자기 땅에 발을 딛는 즉시 공격할 준비를 마친 채 대기하고 있는 콜키스군을 보았다.

콜키스 전투: 크세노폰의 교묘한 진법

콜키스군은 거대한 산의 비탈에 늘어서 위에서 협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을 본 그리스군은 즉시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크세노폰의 제안에 따라 그리스군은 호플리테스 중대를 깊게 세워 늘어놓되, 중대 사이에는 빈 공간을 남겼다. 이렇게 하면 최외곽 중대들이 적 진형을 측면에서 포위할 수 있었고, 중앙 중대들은 깊은 대열 덕분에 어떤 공격이든 버틸 수 있는 결속력을 갖출 수 있었다.

적들이 중대들 사이 빈틈으로 뛰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럴 경우 최소 두 개의 그리스 중대에게 동시에 공격당해 섬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보병 부대는 600명씩 3개 부대로 나뉘어 극좌, 중앙, 극우에 배치되었다. 이로써 팔랑크스의 중심부는 보호받았고, 양익은 적의 측면 공격을 방어하는 동시에 적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전열을 갖춘 그리스군의 총 전력은 9,800명이었다. 그때까지 그리스군의 손실은 약 3,000명에 달했는데, 약 10개월간 쌓인 수치였다. 하루 평균 사상자는 10명 정도로, 그 위업의 규모를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

마침내 그리스인들은 기도를 올리고 파이안(승전 찬가)을 부른 뒤 적을 향해 진격했다. 양익에서 포위될 위기에 처한 것을 본 콜키스군은 전선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나 서투른 기동 끝에 진형 중앙에 커다란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그리스인들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카르나니아의 아이스키네스가 이끄는 중앙 경보병 부대가 그 틈으로 돌진해 적 전선 전체를 분쇄했다. 호플리테스 중대들이 도착하자 콜키스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대열을 깨뜨린 채 우왕좌왕 도주했다.

애초에 무질서한 야만인 어찌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군사 기계요, 진정한 프로페셔널 군대인 그리스군을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새로운 승리 후 그리스군은 콜키스족의 땅으로 진군해 수많은 마을과 풍부한 식량이 있는 지역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독성이 매우 강한 꿀도 있었다. 그 꿀을 먹은 병사들은 잇달아 병들었다. 마침내 40킬로미터를 더 행군한 끝에 그들은 트라페주스에 도착했다. 시노페인들이 세운 그리스 식민 도시였고, 시노페인들은 다시 밀레토스인들의 식민 후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