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

기원전 238년 태어나 훗날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Philip V)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 중 한 명인 전설의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의 증손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데메트리오스 2세였는데, 필립이 겨우 아홉 살이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숙부인 안티고노스가 왕국의 섭정으로 나섰습니다. 열일곱 살에 숙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필립은 당대 최연소 군주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대담하고 용맹한 무인이었으며, 그리스에서 벌어진 전쟁들에서 검증된 용기를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위대한 알렉산더와 비교되곤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

헬레니크 동맹 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후, 패권에 대한 야망은 필립의 시선을 이웃 로마와 에피루스·일리리아 지역의 로마 영토로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한니발이 황폐해진 이탈리아를 자유롭게 누비고 있었기에, 동부 아드리아해를 통해 큰 저항 없이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일리리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리수스(Lissus) 함락 외에는 거둔 것이 없는 채 함대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운에 직면한 필립은 로마 역사상 최대의 적인 한니발 바르카와 상호 지원 조약을 맺습니다. 칸나이 참패 이후 남부 이탈리아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어 있던 한니발과의 동맹은 로마 공화국에게 '악의 축'처럼 보였지만, 두 지도자가 구상한 협격 작전은 곧 무력화되면서 의도만큼 치명적이지 못했습니다. 아이톨리아 동맹이 로마 편에 서면서, 헬레니즘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필립의 숙적이자 로마의 교활한 동맹인 페르가몬의 아탈로스가 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동부 지중해의 혼란과 양측을 짓누르던 막대한 전쟁 비용 속에서 필립과 로마 집정관들은 타협안을 모색했고,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평화라기보다 휴전에 가까운 형태로 막을 내렸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칸나이의 굴욕을 포에니 영토에서 설욕하려는 로마의 집념 덕분에, 필립이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와 맺은 밀약은 원로원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완파하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을 앞당긴 이후, 로마 원로원의 그림자는 드디어 그리스 위로 드리워졌습니다. 필립과 안티오코스의 동맹, 그리고 로마의 동맹국이자 안티오코스의 적인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원조 요청은 기원전 200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선포로 이어졌습니다.

누구도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3년간의 전역이 이어진 끝에,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와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Titus Quinctius Flamininus)가 이끄는 로마 군단이 테살리아의 키노스케팔라이(Cynoscephalae) 산맥에서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플라미니누스가 운용한 스무 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제외하면 양군의 전력은 대등했지만, 결과는 마케도니아군 5천 명 전사와 1천 명 포로라는 처참한 균형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베리아식 소모·유인 전술에 더해 코끼리 돌격이 팔랑크스 진형을 둘로 갈랐고, 그동안 무적이라 여겨진 경직된 팔랑크스는 더 민첩하면서도 똑같이 규율 잡힌 전투 방식, 즉 로마 군단 앞에서 첫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

키노스케팔라이의 패배는 저돌적인 필립에게 뼈아픈 좌절이었습니다. 함대의 해체와 은 1천 탈렌트의 배상금 납부에 더해, 그는 친아들 데메트리오스(Demetrius)를 인질로 로마에 넘겨야 했습니다. 플라미니누스의 압도적인 원정 이후 필립은 모범적인 로마의 동맹국으로 행보를 바꿔, 스파르타의 나비스와 옛 동료 안티오코스 3세에 맞서 로마를 도왔고, 그 공로로 빚 일부를 감면받으며 아들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협조만으로는 필립의 숨은 의도를 의심하던 원로원 내 강경파의 불신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습니다. 왕은 발칸 반도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고, 이는 특히 페르가몬을 비롯한 이웃 나라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이 무렵 마케도니아 궁정은 음모로 얼룩졌습니다. 필립의 차남 페르세우스는 형을 질투한 나머지, 데메트리오스가 로마와 손잡고 아버지의 퇴위를 추진한 뒤 공화국의 우호 왕조로 즉위하려 한다고 아버지에게 무고를 퍼붓습니다. 페르세우스가 유포한 그 거짓 고발은 결국 형을 처형대로 이끌었고,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180년 비명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친아들의 처형 명령은 왕의 건강을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렸습니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야 진실과 장남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필립은 그로부터 1년 뒤 암피폴리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방조한 것에 대한 깊은 슬픔 속에서,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왕국의 죽음까지 예감하며 말입니다.

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피드나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고, 젊은 마케도니아 왕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전리품으로 로마 거리를 행진한 뒤, 2년 뒤 알바 푸켄스의 별장에 유폐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로써 위대한 알렉산더의 디아도코이(후계자) 중 하나인 외눈박이 안티고노스의 혈통과, 베르기나 태양 문장으로 상징되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독립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됩니다.

글: 가브리엘 카스텔요(Gabriel Castelló) — 『로마의 숙적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