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신의 법정으로 소환된 왕 — 30일 후 약속대로 죽은 '소환자' 페르난도 4세, 우연인가 카르마인가

역사에는 기막힌 우연들이 너무 많습니다. 방대한 시간과 무수한 인물, 개개인의 이야기가 얽히다 보면 필연적으로 놀라운 일치가 생기기 마련이지요.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이를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신성한 정의' 혹은 '카르마'로 여기고 싶어 합니다. 1312년 스페인(정확히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페르난도 4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소환자(El Emplazado)'라는 별명으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페르난도 4세는 겨우 10세의 나이에 톨레도에서 카스티야 왕위에 올라야 했습니다. 어머니이자 세 차례 왕비였던 마리아 데 몰리나(María de Molina, 본명 Maria Alfonso de Meneses)의 보호 아래에서 말이지요. 그는 객혈(피를 토하는 기침 발작)을 앓던 허약하고 병약한 아이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부모, 즉 카스티야의 산초 4세와 마리아 데 몰리나의 결혼이 두 가지 이유로 교황청의 관면(특별 허가)을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첫째, 두 사람은 3촌 혈연관계였고, 둘째, 당시 인판테 산초는 부유한 카탈루냐 상속녀 길레르마 데 몬카다와 혼인한 전력이 있었지만 결혼 생활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이 불법적인 결혼과 어린 왕의 나약함 탓에 페르난도는 통치 초기부터 폐위를 노리는 수많은 반란과 음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알폰소 10세의 아들이자 왕위를 노리던 삼촌, 카스티야의 후안(타리파의 후안)이 있었습니다.

신의 법정으로 소환된 왕 — 30일 후 약속대로 죽은  소환자  페르난도 4세, 우연인가 카르마인가

마리아 데 몰리나가 바야돌리드 코르테스에서 아들 페르난도 4세를 소개하다 – 안토니오 기스베르트 페레즈(1863)

사실 페르난도 4세는 어디서나 적과 음모를 의심하는, 편집증에 가까운 왕이었습니다. 실재하는 위협이든 병든 정신이 낳은 망상이든, 그 불신은 수많은 반대자들의 처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지저분한 일'을 자신이 깊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곤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후안 알폰소 데 베나비데스(Juan Alfonso de Benavides)였습니다. 왕이 높이 존경하고 믿었으며, 뛰어난 검술 실력까지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카르바할 형제

왕의 적 가운데에는 후안 알폰소 데 카르바할(Juan Alfonso de Carvajal)과 페드로 알폰소 데 카르바할(Pedro Alfonso de Carvajal) 형제가 있었습니다. 칼라트라바 기사단 소속의 기사이자 지휘관들이었지요. 페르난도 4세는 베나비데스에게 이들을 처리하라고 명했습니다. 당대 기록이 이를 상세히 남기지 않아 여러 설이 공존하기 때문에, 카르바할 형제 중 한 명이 단독 결투 끝에 베나비데스를 죽였는지, 아니면 그가 왕궁에서 비열하게 암살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카르바할 형제는 왕의 심복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페르난도 4세가 호위를 대동하고 하엔 지방의 알카우데테 마을로 행군하려 팔렌시아에 머무르던 때, 그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형인 돈 페드로를 돕기 위한 원정이었습니다.

마르토스의 바위

실은 왕은 그 근처 마르토스에 야영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카르바할 형제를 불러 체포한 뒤 살인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형제는 끝내 결백을 주장했지만, 왕은 즉결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참수형(중세 귀족에게만 허락된 죽음)으로도 모자랐습니다. 왕은 두 사람을 페냐 데 마르토스(Peña de Martos) 정상에서 뾰족한 못이 박힌 철창째 던져 버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명 형벌이라기보다 복수에 가까웠습니다. 사슬에 묶인 두 형제는 바위 꼭대기로 끌려 올라갔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왕과 왕실 행렬, 귀족들, 경비병, 구경을 나온 마을 사람들, 그리고 바위 가장자리에 선 두 형제가 있습니다(형제가 그 자리에 있었느냐 아니냐에 대한 이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르바할 형제는 절벽에서 밀려 떨어지기 직전, 판결의 불공평함을 크게 선언하며 마지막으로 결백을 호소했습니다. 30일 안에 왕을 신의 법정으로 소환해 이 불의에 대해 회답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1312년 8월 7일이었고, 카르바할 형제는 왕의 명에 따라 페냐 데 마르토스에서 떨어졌습니다. 부서지고 훼손된 시체가 담긴 철창은 바위 아래 산책로에 방치되었습니다. 이 극심한 불의를 지켜본 마르토스 주민들은 시신을 산타 마르타 교회로 옮겨 장롱지냈고(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다고 전합니다), 철창이 멈춰 있던 자리에 그들을 기리는 십자가를 세웠는데, 이것이 유명한 '눈물의 십자가'입니다.

신의 법정으로 소환된 왕 — 30일 후 약속대로 죽은  소환자  페르난도 4세, 우연인가 카르마인가

페르난도 4세의 마지막 순간 – 호세 카사도 델 알리살(1860)

소환받은 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왕은 계속 진격하여 알카우데테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곧 병을 얻자(어릴 때부터 병약했다는 점은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회복될 때까지 하엔으로 물러나기로 합니다. 어느 날 컨디션이 좋아진 그는 형이 무어인에게서 알카우데테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점심을 일찍 먹고 낮잠을 잔 뒤 그곳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침대 위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입니다. 9월 7일이었습니다. 바로 전날, 카르바할 형제가 왕에게 부여했던 30일의 기한, 즉 신성한 정의 앞에 회답하라는 임기가 만료된 날이었습니다.

역사가 남긴 기록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의견이 갈립니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억울하게 흘린 피가 부른 응보, 즉 카르마라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하나입니다. 페르난도 4세는 처형당한 형제들이 정한 30일의 약속을 지키듯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후대의 역사서는 그를 영원히 '소환자(El Emplazado)'라 불렀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