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스트롱보우' 리처드 드 클레어,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영국 침공의 막을 연 노르만 기사

《플랜태저넷(The Plantagenets)》에서 발췌한 이야기입니다.

 스트롱보우  리처드 드 클레어,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영국 침공의 막을 연 노르만 기사

상징에 불과했던 아일랜드의 '최고왕'

중세 초기부터 아일랜드에는 '최고왕(High King)'이라는 지위가 존재했다. 다만 섬은 코노트, 아일렉, 에르기알라, 얼스터, 미데, 렌스터, 오소리, 먼스터, 톰몬드 등 독립된 왕국들로 나뉘어 있었다. 최고왕은 다른 왕들 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라기보다는, 각지의 왕들로부터 봉건 영주로서 의례적인 경의를 받는 상징적 존재에 가까웠다. 각 왕은 자신의 영토 안에서 자율성을 유지했으며, 최고왕의 실제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가는 그 자리에 앉은 인물의 역량과 힘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왕위를 잃은 렌스터 왕, 잉글랜드로 가다

1166년, 아일랜드 최고왕의 자리를 놓고 렌스터의 왕 디아마이트 맥머차다(Diarmait MacMurchada)와 코노트의 왕 루어리 오크코너(Rory O'Connor)가 격돌했다. 패배한 디아마이트에게 더 굴욕적인 재앙이 이어졌다. 오루크(O'Rourke) 족장의 아내를 납치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무장한 오루크가 그의 영토와 왕국마저 빼앗아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한 디아마이트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국왕 헨리 2세에게 왕위 회복을 위한 도움을 청했다. 당시 헨리 2세는 직접 원정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지만, 대신 자국 신분의 사람들로부터 용병을 모집할 수 있다는 허가장을 내주었다. 디아마이트는 웨일스 변경에서 복무하던 노르만 귀족들을 찾아갔고, 그 제안은 병사·하급 귀족·일확천금을 꿈꾸는 모험가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인, 웨일스인, 그리고 스티븐 왕과 황후 마틸다의 내전 때부터 잉글랜드에 정착해 살던 플랑드르인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부대가 빠르게 조직되었다. 결국 1167년 디아마이트와 함께 아일랜드에 도착한 병력은 국왕이 파견한 정식군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용병 집단이었다.

'스트롱보우' 리처드 드 클레어의 등장

이 침공의 성패를 가른 핵심 인물은 '스트롱보우(Strongbow)'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노르만인 리처드 피츠길버트 드 클레어(Richard fitz-Gilbert de Clare)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펨브록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으나, 앞서 언급된 스티븐과 마틸다의 내전 과정에서 작위를 잃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 모험은 그에게 매력적인 기회였다. 디아마이트는 렌스터 왕국 회복에 성공할 경우 보수로 자신의 딸 아이프(Aoife)와 결혼시키고, 사후에는 그를 왕국의 후계자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1170년, 노르만 기사들의 아일랜드 상륙

드 클레어는 1170년 약 1,000명의 보병과 200여 명의 기사를 이끌고 아일랜드 원정에 합류했다. 이내 렌스터 거의 전역과 더블린을 포함한 아일랜드 동부의 광범위한 지역이 노르만의 지배 아래 놓였다. 1170년 8월 23일, 스트롱보우는 디아마이트의 딸과 혼례를 올렸고, 1171년 장인이 사망하자 약속받았던 상속권을 손에 넣어 아일랜드 안에 사실상 독립적인 노르만 영지를 세울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위기를 느낀 헨리 2세의 직접 침공

아일랜드에 강대한 노르만 세력이 자리잡을 위험에 직면한 헨리 2세는 4,000명의 병력, 그중 500명 이상의 기사로 구성된 정복 원정군을 조직했다. 물론 헨리가 아일랜드 정복에 나선 데에는 또 다른 사정도 있었다. 토머스 베켓 대주교 암살 사건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잉글랜드 국왕은 그 배후로 만인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교황은 속죄의 일환으로 그에게 아일랜드 정복을 명했는데,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교회의 전통 의식을 버리고 로마의 통제에 복종하기를 극히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171년 10월 17일, 국왕이 직접 이끄는 400척의 잉글랜드 함대가 워터퍼드에 상륙했다. 헨리 2세는 더블린에 이르러 아일랜드 및 노르만 귀족들의 복속을 받아냈다. 드 클레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헨리는 그의 영지를 몰수한 뒤 다시 '렌스터 영주(Lord of Leinster)'로 임명함으로써, 이후 그가 아일랜드에서 누리는 모든 작위는 자신의 정공이 아니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명시적 하사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임무를 마친 헨리는 1172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스트롱보우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아일랜드에 남겼다.

식민지화와 윈저 조약

초기 정복에 이어 잉글랜드의 식민과 정착의 시대가 열렸다. 잉글랜드의 법률과 제도가 도입되었고(훗날에는 잉글랜드를 본떠 아일랜드 의회가 설립된다), 처음엔 목조로, 나중엔 석조로 지어진 성곽과 군사·상업 거점들이 잇달아 건설되었다. 침입자를 몰아내려던 최고왕 루어리 오크코너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는 샤논 강 서쪽의 영지로 쫓겨나야 했다. 결국 1175년 체결된 윈저 조약으로 오크코너는 아일랜드 최고왕 자리를 내려놓고 코노트 왕으로 돌아갔으며, 잉글랜드의 헨리 2세를 주군으로 인정했다. 2년 뒤 헨리는 아들 존 무토지공을 아일랜드의 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186년, 잉글랜드는 조약을 저버리고 오크코너를 폐위한 뒤 코노트를 점령했다.

드 클레어의 말년과 남겨진 유산

드 클레어는 1173년 노르만디에서 헨리 2세 곁에서 함께 싸우며 충성을 증명한 뒤, 왕실 총독으로서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이후 아일랜드 반군과의 전투에 남은 생애를 바치다 1176년 세상을 떠났다. 아이프 맥머차다와의 결혼에서 태어난 딸 이자벨 드 클레어는 부모를 잃은 뒤 잉글랜드로 옮겨가, 잉글랜드 국왕의 보호 아래 런던탑에서 자랐다. 이후 사자심왕 리처드가 그녀의 혼사를, 당대 최고의 기사이자 토너먼트의 스타로 추앙받던 윌리엄 마셜에게 허락했다.

부부는 마셜이 아내의 몫으로 상속받은 아일랜드의 광대한 영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이자벨의 유일한 남동생은 어린 시절 요절했다). 이것은 훗날 존 왕 치세에 심각한 문제의 씨앗이 되지만… 그야말로 또 다른 이야기이다.

두 섬의 악연, 그 시작점

디아마이트 맥머차다의 원조 요청, 리처드 드 클레어의 원정, 그리고 섬에 독립된 노르만 왕국이 세워질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던 헨리 2세의 침공 — 이처럼 우연히 겹친 사건들의 연쇄는 오늘날 많은 아일랜드인들에게 두 섬 사이 역사적 갈등의 원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출처 | Lelia Ruckenstein, James O'Malley, 《Everything Irish: The History, Literature, Art, Music, People and Places of Ireland, from A to Z》, Ballantine Books(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