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4월 26일, 프랑코의 명령을 받은 독일 콘도르 군단(Legion Condor) 소속 항공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해 사실상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그 비극으로부터 75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왜 군사적 가치가 거의 없던 이 작은 바스크 도시의 파괴가 스페인 내전의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가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답이 있습니다.
1. 끊임없는 해석과 논쟁의 대상
첫째, 이 사건은 다양한 해석을 낳으며 극심한 논쟁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당시 군사적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 하나가 통째로 파괴된 것은 대중 여론에 설명하기 어려운 전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파 성향의 역사가들은 처음에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고, 이후에는 의도치 않은 '부수적 피해'라는 주장으로 선회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반파시스트 진영 역사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고, 그들은 이 폭격을 파시즘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규정했습니다. 결국 이 논쟁 자체가 게르니카의 상징성을 한층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2. 도시 대량 폭격 전술의 서곡
둘째,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폭격이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된 '도시 대량 폭격' 전술의 서곡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민간인에게 공포를 심어 상대 진영의 사기를 꺾으려는 이 전략은 이후 전쟁사의 흐름을 바꾸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이 같은 폭격은 스페인 내전 기간에도 다른 지역에서 벌어졌습니다. 프랑코군은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알리칸테, 두랑고 등을, 공화파는 사라고사, 오비에도, 카브라 등을 폭격했습니다. 다만 어느 쪽도 게르니카처럼 '완전한 파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카브라 사례처럼 폭격을 유도한 관측병의 실수가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3. 피카소의 걸작이 만든 불멸의 상징
셋째, 이 사건의 명성은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가 세계에 끼친 거대한 반향 덕분에 더욱 커졌습니다. 이 작품은 폭격이 가져온 공포와 절망을 담아낸 회화적 표현 그 자체가 되었고, 바스크의 작은 마을 이름은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세계적 우화와 영원히 연결되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
이러한 이유로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을 상징하는 대표적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모든 무력 충돌이 몰고 오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부당함을 후세가 결코 잊지 않도록, 그 기억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하신토 안톤(Jacinto Antón)이 올해 4월 22일 엘 파이스(EL PAÍS)에 발표한 글은 이 폭격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해당 사건과 관련된 기본 참고 문헌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