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속 영국사가 특히 독특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16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사략선(私掠船)'이라는 제도 때문일 것입니다.
국가가 해적을 보호하는 방식

해적의 존재는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왜구'가 큰 문제가 되었고,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역시 지중해 무역에서 해적에게 시달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아덴만 해역에서 해적이 큰 골칫거리가 되었으며, 미국 건국 초기에도 '바르바리 전쟁'이라 불리는 해적과의 전쟁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사에는 해적으로 고통받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해적을 적절히 활용한 나라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적을 성공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두 나라가 바로 오스만 제국과 대영제국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해적들을 보호하며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선박을 공격하고, 약탈품의 일부를 조공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근대 국가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대영제국도 놀랍도록 동일한 시스템을 채택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들이 '사략선(privateer)'이라 불렸습니다. 영국 왕실의 공식 면허를 받은 이들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선박을 공격하고, 그 약탈품의 일부를 왕실에 바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경쟁국들을 몰아내고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었으며, 위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왜 스페인이 표적이 되었는가
모든 것은 스페인의 후원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신대륙의 발견은 스페인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근대 유럽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될 감자와 가지의 원산지가 아메리카라는 점, 그리고 은광까지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은 '유럽 가격혁명'이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페인은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과의 무역에 집중하며 부를 축적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러한 재력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더욱 강력한 패권적 지위를 누렸지만, 오스만 제국과 영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프레베자 해전에서 스페인을 격파했으나, 이후 레판토 해전에서는 오히려 스페인에게 패배했습니다.
반면 영국을 다스리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처음부터 화려한 함대 결전을 피하고, 프랜시스 드레이크 같은 해적들을 이용해 스페인 상선을 공격하며 서서히 스페인의 국력을 갉아먹었습니다. 분노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영국으로 파견했고, 양국은 아르마다 해전에서 충돌했지만, 영국의 승리를 결정지은 것 역시 바로 이 해적들이었습니다.
스페인 선박들은 대형 배 특유의 둔중함 때문에 섬세한 기동이 어려웠고, 해적들이 이끄는 소형 함대 중심의 영국 해군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페인 왕실은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부에도 불구하고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됩니다.
카리브해의 해적, 버커니어
승자였던 영국은 여전히 사략선 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스페인 선박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아르마다 해전 이후 해적들의 본거지는 카리브해로 옮겨갔습니다. 카리브해의 바하마 뉴프로비던스 섬은 해적들로 너무나 붐베서 '해적의 낙원', '해적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였으며, 이곳의 해적들은 '버커니어(Buccaneer)'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버커니어가 반드시 영국의 보호를 받는 해적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략 면허를 소지하고 스페인 선박을 공격하는 해적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중 헨리 모건은 영국의 영웅이라 불릴 정도였으며, 모국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게 됩니다.
영불 전쟁과 사략선
사략선의 존재 방식은 영국을 둘러싼 정세 변화에 따라 크게 달라졌습니다. 예를 들어 1670년 스페인과 영국 사이에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페인 선박은 사략 행위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루이 14세가 프랑스 국왕이 된 이후 영불 전쟁이 격화되면서 영국 사략선의 표적은 스페인 선박에서 프랑스 선박으로 바뀌게 됩니다.
'흑수장(Blackbeard)'으로 유명한 해적 에드워드 티치 역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앤 여왕의 전쟁)에 참전했던 인물로, 프랑스를 상대로 한 사략 활동의 비중이 점차 커져가던 시기의 인물입니다.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남북전쟁과 사략선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사략선들이 미국 혁명군을 공격했고,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는 프랑스가 사략선 지원에 앞장섰습니다. 양측 모두 사략선을 통해 미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사상 최대의 내전이라 불리는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남군이 사략선을 지원하여 북부의 도시들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사략선에 대한 생각
사략선 제도는 1856년 파리 선언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로써 열강들은 해적 지원을 중단했고,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는 모든 무장 상선이 등록 대상이 되면서 사략선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략선 제도는 해적의 존재를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은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적은 약탈로 생계를 꾸리는 무법자이지만, 국가의 보호 아래에서는 그 행위가 정당화됩니다.
드레이크로 대표되는 사략선들은 영국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짊어졌고, 그들의 존재는 오늘날까지 역사 속 영웅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대영제국이 '해적이 만든 나라'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영국이 근대화되면서 해적행위를 지원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사략선이라는 제도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립니다.
그 배경에는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를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영국이 더 이상 해적질로 돈을 벌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기 만화 '원피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왕하 칠무해'는 바로 이 사략선을 모티브로 한 설정입니다. 해적들의 입장에서 보면 칠무해는 그저 '정부의 앞잡이'에 불과하다고 말해지곤 합니다.
실제로 모건이 그랬던 것처럼, 사략선들은 국가의 뜻에 따르지 않는 해적들을 단속하는 임무에도 관여했습니다.
해적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사랑받지만, 키드 선장의 사례가 보여주듯 그 삶과 죽음은 언제나 국가의 사정에 좌우되어 왔습니다.
정의란 무엇이며, 자유란 무엇일까요?
카리브해에서 활약했던 해적들을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