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잉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초대 국왕, 제임스 1세

튜더 왕조의 끝, 그리고 스튜어트 왕조의 시작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써 튜더 왕조는 그녀와 함께 막을 내렸고,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의 혈통을 잇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새롭게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잉글랜드'라는 이름으로 두 나라를 하나로 묶어 부르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본격적으로 합병된 것은 17세기 전반의 일입니다. 제임스 1세가 즉위하던 당시에는 여전히 별개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를 단순히 '잉글랜드'라고 부르기보다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동군 연합(Personal Union)'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이름을 지어준 왕, 그러나 어머니는 처형당하다

잉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초대 국왕, 제임스 1세

1566년,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헨리 스튜어트 경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였으며, 이름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지어주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과 메리 여왕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고, 결국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가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처형하고 맙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의 처형은 교황과 스페인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은 무적함대(아르마다)를 잉글랜드로 파견하면서 양국 간에 아르마다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은 놀랍게도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의외의 선택으로 메리의 아들 제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원래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왕위 계승법을 통해 스튜어트 가문의 자손이 잉글랜드 왕이 되는 것을 금지해 두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제임스 1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상당히 학식이 깊은 인물로, 『자유 군주국의 참된 법(The True Law of Free Monarchies)』이라는 책을 직접 집필했으며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의 대표적인 옹호자였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의원들이 우려를 표했지만,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근본법', 즉 의회를 중시하는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보이자 의회는 그를 환영했고,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버금가는 기간 동안 의회를 운영했습니다.

종교 문제

'종교 개혁'이 유럽 역사에 남긴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8세 때부터 교황에 맞서 성공회(Anglican Church)가 만들어졌고,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가톨릭 세력을 강하게 탄압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위를 동시에 계승한 제임스 1세는 바로 이 부분에서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제임스 1세에게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하나의 나라로 묶는 '완전한 통합', 즉 언어·법률·의회·종교까지 통일하려는 비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는 상당한 난관에 부딪혔고, 결국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목표로 남았습니다. 특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의회와 종교를 중앙집권화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이 문제를 '분리 통치'로 해결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잉글랜드는 성공회와 잉글랜드 의회로,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 교회와 스코틀랜드 의회로 각각 통치하는 방식으로 두 나라를 병행 운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잉글랜드 내 가톨릭 세력의 반발은 컸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 내내 탄압받아 온 그들은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였던 제임스 1세에게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기본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노선을 계승해 가톨릭을 계속 억압했고, 이에 분노한 가톨릭 세력은 결국 제임스 1세를 폭파하려던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을 일으키게 됩니다.

재정 감각이 없던 학자형 왕

오늘날에도 학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재정 감각이 부족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제임스 1세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와 왕실이 쌓아 올린 빚은 무려 6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곤경에 처한 제임스 1세는 일부 봉건세를 폐지하는 대신 매년 2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의회에서 받겠다는 이른바 '대계약(Great Contract)'을 추진했지만, 이는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남작(Baron)과 기사(Knight) 사이에 위치한 새로운 작위 '준남작(Baronet)'을 만들어 이를 판매함으로써 재정을 충당하려 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의회와 제임스 1세 사이에 균열이 본격적으로 벌어졌고, 제임스 1세는 1614년 이후 6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는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습니다.

제임스 1세가 다시 의회를 열게 된 계기는 독일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이었습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내였는데, 프리드리히 5세는 바로 30년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딸을 구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지만, 애초에 제임스 1세 일가의 낭비 탓에 전쟁을 치를 만큼의 자금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제임스 1세는 아들과 스페인 공주의 혼담을 추진했지만, 스페인에 적대적인 의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제임스 1세 본인도 스페인과의 화해를 위해 해적들에게 발급하던 사략 면허를 철회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이 또한 의회의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좌절이 거듭되던 가운데, 제임스 1세는 162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8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