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46년 폰토케라시아 매복 사건: 민간인 방패와 내부 배신으로 궤멸한 중대

1946년 폰토케라시아 매복 사건: 민간인 방패와 내부 배신으로 궤멸한 중대

폰토케라시아(Pontokerasia)는 그리스 킬키스 현과 세레스 현의 경계에 위치한 작은 산간 마을이다.

방심 속에 주둔한 국경 수비 중대

1946년 당시 이 마을에는 제10보병사단 예하 제37여단 소속 제567보병대대 제4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미하일 스테파누(Michael Stefanou) 대위가 지휘하는 이 중대는 병력 120명으로 구성되어 마을 외곽 언덕 위에 진영을 차리고 있었다.

스테파누 대위는 마을 변두리의 한 가옥에 숙소를 잡았다. 쌍안경 네 대를 설치해 감시 태세를 갖춘 듯했지만, 정작 진영으로 통하는 접근로를 차단하거나 경계하는 조치는 전혀 취해져 있지 않았다. 더욱 기이한 것은 중대의 기관총까지 마을 안의 한 가옥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새벽 3시 15분, "인민"을 외치는 군중의 출현

1946년 7월 5일 새벽 3시 15분경, 폰토케라시아와 인근 마을의 여성들과 아이들로 이루어진 무리가 갑자기 중대 진영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인민"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치며 병사들에게 "인민과 하나가 되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 소동에는 숨겨진 손길이 있었다. 중대에 근무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스칸젤리스(Skandzelis) 하사와 그에 동조하는 병사들이 사전에 손을 써 두었기 때문에, 중대는 그날 밤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벌어진 소란에 장교들이 달려가 군중에게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라고 호령했지만, 돌아온 것은 돌팔매질뿐이었다. 일부 장교는 위협 사격을 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자제를 권했다. 결국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지휘관이 끝내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서 중대 지휘부의 리더십 부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민간인 방패 뒤에 숨어 있던 반군

소요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중대 내부의 반군 병사들이 군중 속으로 스며들어 합류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군중이 일제히 길을 비켜섰다. 그리고 그 뒤에서 약 100명 규모의 반군이 이미 전투 대형을 갖춘 채 기다리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반군은 지체 없이 박격포, 기관총, 기관단총으로 중대를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개시했다. 동시에 중대 내부의 공산주의 병사들도 뒤돌아서 아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궤멸, 약탈, 그리고 도주

예상대로 진영은 대혼란에 빠졌다. 스테파누 대위는 필사적으로 혼란을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몇몇 병사들과 함께 도주하여 약 세 시간 뒤 파로크티오스(Parochthios) 마을에 도착했다.

한편 중대 진영은 완전히 유린당했다. 모든 무기와 식량, 탄약이 반군의 손에 넘어갔으며, 말 한 마리와 노새 19마리마저 빼앗겼다. 곧이어 반군 부대는 베레스(Beles) 산맥 방면으로 이동, "형제" 티토가 다스리는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영토로 넘어갔다. 스칸젤리스를 따른 병사 약 40명도 그들과 행동을 함께했다.

이 매복 공격으로 중대는 전사 7명, 부상 33명의 피해를 입었다.

유사한 매복과 다른 두 가지 지점

이 사건은 당시 유사한 매복 작전들과 비교해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첫째, 반군이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삼아 그 뒤에 전투 대열을 은밀히 배치했다는 점이다. 둘째, 같은 취사장에서 밥을 먹고 담배를 나누어 피우던 동료 병사들이 불과 몇 순간 만에 뒤에서 아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점이다.

추격과 군사재판의 최후

그리스 육군사 편찬기구(DIS/GES)의 공식 전사에 따르면, 정부군은 반군을 추격하여 손실을 입히고 약탈 물자 일부를 회수했다. 스칸젤리스와 함께 도주했던 17명의 이탈 병사들도 훗날 체포되었다.

1946년 8월, 킬키스 군사법원은 스칸젤리스와 마을 교사, 병사 5명, 마을 주민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집행했다. 또 다른 주민 14명과 중대 병사 2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