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는 '로마의 제2의 아버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일반 역사 교과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어 대중에게는 낯선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카밀루스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다섯 번이나 독재관에 선 남자
공화정으로 전환한 뒤 로마의 정치 체제는 두 명의 집정관과 원로원이 함께 통치하는 형태였습니다. 이 체제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긴급 상황에서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의사결정이 느려 경쟁에서 밀리는 많은 대기업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만약 로마가 이처럼 느린 의사결정을 고수했다면, 당시 강대국이 아니라 작은 충격에도 무너질 수 있던 나라였기에 금방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국가적 긴급 상황이 닥치면 '독재관(Dictator)'을 임명하는 제도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독재관의 임기는 최대 반년으로 짧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력이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적었습니다. 이렇게 유연한 체제를 채택할 수 있었던 점이야말로 로마의 진정한 강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재관으로 임명되는 사람은 상당한 신뢰와 능력을 갖춰야 했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건 위기를 책임질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카밀루스는 바로 그 자리에 다섯 번이나 올랐던 인물입니다.
베이 함락과 뜻밖의 추방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에트루리아인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입니다.
건국 초기의 로마는 북쪽의 에트루리아 세력과 남쪽의 그리스 세력 사이에서 살아남던 작은 도시 국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지휘 아래 로마는 에트루리아를 누르며 성장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군사 지휘를 맡은 카밀루스는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이(Veii) 함락에 성공합니다.
베이는 로마가 오랫동안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새 도시였으며, 당시 기준으로 도시로서의 기능 자체가 로마보다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낸 평민 계급은 귀족의 색채가 짙은 로마 대신 베이를 새 수도로 삼기를 원했고, 여기에 반대한 카밀루스는 추방당하고 맙니다.
카밀루스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좋은 사람이 항상 인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기에 베이 함락전에서 겨울 야영을 강요당한 데 대한 원한도 더해졌다고 합니다.
결국 카밀루스는 베이 함락 때 얻은 전리품을 부정하게 처분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합니다.
당시 로마에는 스스로 로마를 떠난 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독특한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카밀루스는 자발적으로 로마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로마 최대의 위기! 갈리아인의 침입
로마 공화정 역사상 최대의 위기는 아마도 기원전 390년에 일어난 갈리아인의 침입일 것입니다.
갈리아인은 당시 프랑스 지역에 살던 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오늘날에는 켈트족이라고 부릅니다. 아서 왕 전설의 주인공 아서 왕도 고대에는 켈트계 인물이었습니다. 이 민족의 후손은 오늘날 아일랜드에 살고 있으며, 세계적인 가수 엔야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 켈트족이 침입하자 로마는 참패하고 도시의 절반이 점령됩니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이래 로마가 직접 공격당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두 번째는 무려 800년 뒤인 서기 410년의 일입니다.
로마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면서 간신히 위기를 넘기지만, 그대로 굴복하고 물러설 성미가 아니었습니다.
급히 소환된 카밀루스는 즉시 켈트 진영을 공격해 들어가, 빠르게 켈트족을 로마에서 몰아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카밀루스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로마는 금이 아니라 검으로 되찾는다."
이 말은 이후 로마의 기본 방침이 되었으며, 실제로 그 뒤 로마가 포로 몸값을 지불한 사례는 없습니다.
켈트족에게 크게 파괴된 로마의 모습을 본 주변 국가들은 호기를 노리고 공격해 옵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주변 국가들과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며 네 차례의 개선식을 거행했고, 잃었던 로마의 위엄을 완벽하게 되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