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Kaiserliche und Königliche Armee, 약칭 K.u.K.)은 빈에서 헝가리와 맺은 타협 이후 '제국 및 왕국 군대'로 불리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근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타협 이후 군대와 관련된 모든 변경 사항은 헝가리 의회의 심의를 거쳐야 했고, 개혁 추진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다민족 제국의 딜레마
독일인을 중심으로 헝가리인, 체코인, 루마니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이탈리아인 등이 공존하던 다민족 합스부르크 제국은 19세기 내내 내부에서 부상하는 민족주의·분리주의 운동에 시달렸다.
군대는 바로 이 민족 집단들이 융합되는 접점이었으며, 고귀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야의 K.u.K. 군은 최상의 상태가 아니었다. 재정난에 더해 헝가리 의회의 견제까지 겹치면서 군대에 투입할 수 있는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주목할 점은 제국 내에 지배적인 민족 집단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차르 러시아나 오스만 제국에서 각각 러시아인과 튀르크인이 지배 세력이었던 것과 달리, 합스부르크 국가에서 독일인은 인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등장
1881년 참모본부가 설립되면서 분위기 전환을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1906년에는 프란츠 자비어 요제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Franz Xaver Joseph Conrad von Hötzendorf)가 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 '콘라트'로 널리 알려지게 된 그는 짧은 공백기를 제외하고 1917년까지 이 자리를 유지했다.
콘라트는 처음부터 이탈리아 또는 세르비아에 대한 선제전쟁을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개혁가로 평가받았지만, 콘라트는 공격자가 주도권을 쥐고 방어자에게 자기 의지를 강요한다는 '맹목적 공격' 교리의 신봉자였다.
이러한 관점 자체가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전장 환경의 변화를 간과한 데 있었다. 1914년, 현대 포병과 기관총이 보편화된 전장에서 지형과 적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공격하는 것은 순수한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레들 대령의 배신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흔든 것은 악명 높은 '레들 사건'이었다. 동성애자였던 오스트리아군 첩보 대령 알프레드 레들은 성적 취약점을 협박당하고 거액의 뇌물을 받으면서 러시아에 매수되어, 오스트리아 군의 방어 계획과 전략적 병력 집중 계획을 통째로 넘겼다.
1903년부터 1913년까지 레들은 조국의 비밀을 러시아에 팔아 막대한 금품을 받으며 문자 그대로 왕족처럼 사치스럽게 살았다. 그가 팔아넘긴 정보에는 세르비아에 대한 작전 계획과, 갈리치아(폴란드)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병력을 집중하기 위한 전략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이 정보를 세르비아에도 전달했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1914~15년 두 차례의 치욕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패배를 당하게 된다.
레들의 배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모든 계획을 러시아에 넘기는 한편, 상급 지휘부에는 러시아군에 관한 허위 정보를 보고했다. 실제 병력 규모와 전략적 배치와는 전혀 다른 그림을 제시한 것이다. 동시에 러시아 내 오스트리아 첩보원들의 명단을 '팔아넘겨' 이들이 제거되도록 만들었다.
배신이 발각되자 콘라트는 러시아 전선(갈리치아)의 병력 집중 계획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레들이 곧바로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세르비아 방면 계획마저 유출되었다는 사실은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계획 변경이 가져온 결정적 결과
콘라트의 원래 구상은 주력을 렘베르크(현재 우크라이나 리비우) 주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오스트리아군은 비스툴라강과 부크강 사이에서 공격해 당시 러시아령 폴란드, 특히 바르샤바를 위협하거나, 북동쪽 두브노 방면으로 진격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과 폴란드의 러시아군을 분리한 뒤 내선에서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들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와 세르비아가 이미 오스트리아의 원래 계획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안 콘라트는 계획 변경을 강요당했다. 그는 갈리치아의 원정 집결지보다 더 서쪽으로 주력을 집중하고, 불충분한 병력으로 세르비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개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레들 대령

1914년 갈리치아의 K.u.K. 병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