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는 지리적으로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은 땅이다. 수세기 동안 이곳의 위치는 아시아나 중동으로 향하는 통로를 장악하고 바다로 진출하고자 했던 온갖 정복자들에게 하나의 '전리품'이었다.
글: 요르고스 디메노스(Giorgos Dymenos)
출처: Gazzetta
동시에 발칸반도는 하마터면 '유럽의 실리콘 창고'라는 별명을 얻을 뻔한 곳이기도 하다. 양측의 영유권 주장과 오스만 제국의 점령은 이 땅의 사람들을 장기간 적대 관계로 몰아넣었고, 그 갈등은 지난 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막을 내렸다.
콘스탄티노플 함락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식까지, '학살'이나 '약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리스인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튀르크인이나 독일인이 떠오른다. 두 나라에게 모두 크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그리스는 또 다른 죽음의 위협, 즉 불가리아와 마주해야 했다.
동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전역은 이웃나라의 '구원 정책'이라는 이름의 제단 위에서 소멸의 위기를 겪었다. 그 기점은 산스테파노 조약이었다. 1878년 '대불가리아'가 처음으로 탄생했는데, 이 국가는 짧은 기간만 존속했지만 수십 년간 불가리아의 확장주의적 야망에 부채질을 했다.
그럼에도 공동의 적인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그리스는 제1차 발칸전쟁에서 불가리아와 손을 잡았다. 오스만의 멍에를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1912년 10월부터 1913년 5월까지 그리스군은 육지와 해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수백만의 동포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동맹국은 적으로 돌변했고, 스스로를 '강대국'이라 규정한 불가리아는 국경을 넓히기 위해 그리스를 공격했다.
약 한 달간(1913년 6월 29일~7월 31일)에 걸친 제2차 발칸전쟁에서 그리스군은 역사에 새로운 '황금의 페이지'를 남겼고,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대부분을 모국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자신을 무적이라 여기는 자들이 늘 그렇듯, 불가리아군은 전장에서 당한 굴욕적인 패배의 보복으로 무방비한 민간인들에게 분풀이를 자행했다. 1913년 6월 30일, 드라마 인근에 위치한 독사토(Doxato)는 파멸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담배로 번영한 평원의 마을
독사토는 평원 한가운데 자리한 마을로 담배 생산과 교역으로 번성했다. 1912년 10월 불가리아군에 점령되었지만, 이듬해 여름 그들은 그리스군이 도시 하나하나를 해방시키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시데로카스트로, 카발라, 세레스… 그리고 다음 목표는 드라마였다.
제7사단의 일부 부대는 이 방향으로 진격 명령을 받았고, 7월에는 샨티, 코모티니 등 많은 도시에서 청백기(그리스 국기)가 휘날렸다. 그러나 그 사이, 무고한 사람들의 피로 땅이 붉게 물들고 말았다.
6월 30일, 지옥이 현실이 된 날
6월 28일 금요일, 후퇴하던 불가리아군의 잔여 병력이 처음으로 독사토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미 대기하고 있었고, 파나기오티스 대위와 그의 부하들의 도움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에는 모든 것이 평온해 보였고, 그리스군이 가까워지면서 방비도 늦춰졌다. 그러나 30일, 성 사도의 날, 마을 외곽에 수많은 불가리아 기병이 나타나면서 죽음의 장막이 독사토를 덮기 시작했다.
특히 불가리아 비정규 무장단체인 코미타지(Komitadji)들은 이 지역 무슬림들에게 '터키가 자신들과 연합해 기독교도에 맞서고 있다'고 선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불가리아군은 가옥에 뛰어들어 무차별적으로 살육을 자행했다. 어린 소녀와 여성들은 죽은 부모와 남편 앞에서 끔찍한 성폭력을 당했으며, 아이들과 노인, 사제들도 잔혹한 최후를 맞았다.
임산부들의 배는 갈라져 태아가 유린당했고, 극소수만이 무기를 들고 저항하거나 정복자들의 격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악명 높은 디테일 하나는, 많은 침략자들이 하얀 도살자 앞치마를 두른 점이다. 칼과 창으로 대부분의 희생자를 살해하면서 제복에 피가 묻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생자들의 목을 베고 고문하며 천천히 죽이려 했고, 일부 주민들은 참수당하거나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까지 받았다.
피에 대한 갈증이 채워진 오후, 그들은 값나가는 물건들을 약탈한 뒤 가옥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1913년 6월 30일 하루의 비극적인 결산은 무려 650명의 사망자였다. 놀라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증거 인멸 시도, 그리고 외신의 목격 기록
다음 날 새벽 불가리아군은 저지른 만행의 증거를 지우기 위해 독사토로 돌아오려 했지만, 그리스군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시간적 여유가 없자 서둘러 철수했다. 그들은 범죄의 공범이었기에 그리스인의 보복을 피하고 싶어하던 여러 무슬림들과 함께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주민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고, 이후 그들의 운명에 대해선 어떤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의 강제 수용소 어딘가에서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7월 1일 그리스군은 드라마에 입성해 독사토에서 벌어진 참극을 알게 되었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생존자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으며, 그리스군은 사방에 널린 수백 구의 시신이라는 끔찍한 광경을 처음 목격한 이들이었다.
여기에 영국의 카달 대위 같은 외국인들도 합류했는데, 그는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에 이렇게 기록했다. "도시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의 살점을 게걸스레 먹는 개떼였다. 완전히 파괴된 도시는 텅 빈 것처럼 보여 폐허 속에서 누군가 나타나도록 몇 번이고 불러야 했다."
"모든 시신은 창에 꿰뚫려 있었고 믿기 힘든 훼손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집 벽에는 바닥에서 6피트(약 1.8미터) 높이까지 피가 묻어 있었는데, 생존자들에 따르면 불행한 희생자들이 즉시 학살되지 않고 창에 찔린 채 오랫동안 고통받다 죽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군기자 크로퍼드 프라이스(Crawford Price)도 타임스(The Times)에 비슷한 내용을 전했다. "독사토에서 벌어진 일의 진실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따르면 고문당한 많은 희생자들이 구조되었는데, 열 개의 창에 꿰뚫렸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청년도 있었고, 불가리아 기병의 칼에 머리에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들이 병원에 가득했다."
영웅이자 순교의 도시로
독사토는 1917년에도 불가리아의 공격 표적이 되었고, 1941년에는 나치 독일마저 저항의 서사에 대한 보복으로 이곳에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오늘날 독사토는 해발 100미터 지점에 2,0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당당히 서 있다. 그리스 국가는 지난 세기 전쟁의 참화 속에서 견딘 고통을 기려 이곳에 '영웅 및 순교 도시(Heroic and Martyr City)'라는 칭호를 헌정했다. 그 기억은 106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