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1일 만에 무너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군을 덮친 충격과 혼란

11일 만에 무너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군을 덮친 충격과 혼란

1941년 4월 6일, 나치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개시했다. 불과 열흘여 만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항복했고, 이 초고속 붕괴는 발칸 반도에서 독일에 맞서 함께 싸워야 했던 그리스를 예상치 못한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스 참모본부가 이 혼란의 한복판에서 어떤 정보를 받았고,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모순투성이였던 전황 정보

1941년 4월 7일, 토마스 펜조풀로스(Thomas Pentzopoulos) 대령은 당시 유고슬라비아 영토였던 모나스티르(현 북마케도니아 비톨라)에 있었다. 그는 그리스 육군참모본부(GS)가 파견한 특사로,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유고슬라비아 참모본부와의 연락망을 구축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리스 사령부가 입수한 정보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상당 부분 서로 모순되어 있었다. 참모본부에는 독일군이 특히 요새선 북쪽 지역에서 유고슬라비아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었다.

반면 영국 정보기관과 아테네 주재 유고슬라비아 무관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고, 오히려 유고슬라비아군이 불가리아 영토 안으로 진격했다고까지 확언했다.

특사가 목격한 '해체의 현장'

펜조풀로스 대령은 모나스티르에 도착하자마자 군대가 와해되어 가는 광경을 마주했다. 벨레스(Veles)에 이르러서는 이미 해체된 '브레갈니차' 사단의 지휘관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판단으로 스코페까지 이동을 시도했으나, 그 도시는 이미 독일군에게 점령된 상태였고 결국 도달하지 못했다.

늦게 처리된 보고, 절반짜리 조치

펜조풀로스는 이 같은 상황을 본국 참모본부에 보고했지만, 그의 보고는 시국이 요구하는 즉각성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군의 급속한 붕괴는 그리스 지도부를, 유고슬라비아 측만큼이나 기습한 듯했다. 그럼에도 참모본부는 중앙마케도니아의 그리스·영국군 배치를 재조정해 북쪽으로 정면을 형성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북부 에피루스 전선에서 싸우는 그리스군의 측후방을 위협할 수 있는 플로리나 회랑을 엄호하기 위해, 가용한 소수 부대의 추가 이동도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절반짜리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 움직임은 늦었을 뿐 아니라 불충분했다. 4월 7일 펜조풀로스의 첫 보고 시점에서 교정 조치가 내려졌어야 했고, 무엇보다 북부 에피루스 주둔 그리스군의 철수 준비가 착수되었어야 했다. 최소한 서마케도니아군집단(TSDM) 병력이라도, 북부 에피루스 그리스군 우익 엄호를 맡은 기병사단과 강력한 연계를 구축해 우회 견제를 가능하게 했어야 했다.

두 번째 특사, 그리고 무리한 요청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참모본부는 4월 9일 또 다른 장교를 유고슬라비아로 파견했다. 테오도시오스 파파타나시아디스(Theodosios Papathanasiadis) 소령이었다. 그는 이동 중 사고를 겪으면서도 4월 10일 저녁 몬테네그로에, 이듣날 저녁에는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그리고 홀로 4월 13일, 유고슬라비아 참모본부에 도달해 알바니아의 이탈리아군에 대한 유고슬라비아군 공세 개시를 요청하는 그리스 참모본부의 의사를 전달했다.

물론 이 요청은 관대하게 평가해도 무리한 것이었다. 이미 어디를 공격할 유고슬라비아군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파타나시아디스가 아테네로 돌아온 것은 4월 14일 저녁이었다. 그 무렵 독일군은 이미 4월 10일부터 상설 배치되지 않은 그리스·영국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북부 에피루스 그리스군에 대한 철수 명령이 하달된 것은 4월 12일에야 이루어졌다.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주목할 점은 서마케도니아군집단(TSDM)이 이미 4월 8일, 자신들이 미리 세워둔 철수 기동안의 승인을 참모본부에 요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앙마케도니아군집단의 궤멸과 영국군의 철수 이후, 그리스군은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하나였어야 할 방어선

물론 이상적인 선택은 그리스군과 영국군을 두 개(벨레스–네스토스 선, 베르미오–올림포스 선)가 아닌 하나의 방어선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동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의 일시적 포기가 전제되어야 했고, 요새선 밖의 병력을 북부 에피루스의 그리스군 측면까지 함께 엄호할 수 있는 선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그러나 벨레스–네스토스 거점의 포기는 끝내 결정되지 않았다. 아테네는 베오그라드가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해주기를 기다렸고, 무엇보다 정권 교체 이후의 유고슬라비아가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 대해 충분히 오래 버텨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일 만에 무너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군을 덮친 충격과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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