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세기의 외세 지배, 그리고 영국령이 된 키프로스
키프로스는 수백 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다. 1878년 오스만 제국은 이 섬을 영국에 할양했다. 당시 키프로스인들은 영국이 적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과 그리스의 통합, 이른바 '에노시스(Enosis)'를 허용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새 통치자를 환영했다. 영국이 이전에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 넘겨준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통치 기간 내내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은 조국 그리스와의 통합을 향한 열망을 결코 접지 않았다.
1889년 키프로스 대표단이 런던을 찾아 그리스와의 통합을 공식 요구했고, 1895년에는 섬 전역에서 통합을 촉구하는 집회가 잇달아 열렸다. 이후 1902년과 1907년에도 같은 요구를 내걸고 대규모 집회가 거듭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키프로스인들의 뜻을 존중하기는커녕, 1914년에는 키프로스를 왕실 직할령으로 공식 병합해 버렸다. 1915년 영국은 그리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 편으로 참전하는 조건으로 키프로스를 그리스에 양도하겠다는 제안을 꺼냈지만, 당시 그리스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21년에는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 100주기를 맞아 키프로스 전역에서 조국과의 통합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1928년에는 영국 점령 50주기를 계기로 섬 전체가 다시 한번 집회 열풍에 들썩였다.
1년 뒤인 1929년, 키티의 주교 니코디모스가 이끄는 키프로스 대표단이 다시 런던을 찾아 키프로스의 그리스 편입을 요구했다. 동시에 키프로스인들은 그리스 정부에도 지원을 호소했지만,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정부의 빗장에 막혀 좌절하고 말았다.
반란의 발발
영국과 그리스 정부 모두에게 실망한 키프로스인들은 이제 스스로의 손으로 운명을 쥐기로 결심한다. 당시 영국 총독 롤런드 스토어스(Roland Storrs)가 무거운 세금 부과를 결정하자, 키티의 주교는 10월 18일 키프로스인들에게 영국 지배에 불복종하고 그리스와의 통합을 위해 싸울 것을 호소했다.
10월 21일, 드디어 반란이 터졌다. 사제들이 앞장선 가운데 최소 5,000명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주로 젊은이와 학생들이 니코시아에 모여 통합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 군중은 총독 관청을 포위한 뒤 돌을 던지고 난입해 건물을 점거하고 불태워 버렸다.
같은 시각 키프로스 곳곳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반군들은 영국 국기를 내리고 그리스 국기를 게양했다. 니코시아에서 영국군은 실탄을 발사해 15세 소년을 포함한 그리스인 7명을 살해했다.
영국 당국은 무력으로 11월 초 상황을 진압했고, 동시에 키프로스 주재 그리스 총영사 알렉시오스 키루(Alexios Kyrou)가 소요를 선동했다고 비난했다. 이번 반란으로 사망자 외에 그리스인 30명이 부상을 입었고, 10명은 종신 추방형을 선고받았으며—그중에는 키티의 니코디모스도 있었다—또 다른 2,606명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이 각종 형벌을 받았다. 아울러 아테네는 영국의 압력에 굴복해 키루를 섬에서 철수시켰다. 당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끝내 키프로스인들의 반란을 지원하지 않았다.
실패가 남긴 것: 더 가혹해진 통치
진압된 반란의 결과는 영국의 태도를 더욱 강경하게 만들고 탄압을 한층 심화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통합(Union)'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그리스 국기 게양조차 금지했다. 스토어스는 물러났고, 그 뒤를 이어 더욱 강경한 리치먼드 파머(Richmond Palmer)가 총독에 임명되면서 '파머 통치(Palmerocracy)'라 불리는 암흑기가 열렸다.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영국이 다시 그리스의 도움이 필요해질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