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부터 바로잡자: '거부'가 아니라 '유예'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침공 전까지 독일과의 대결을 일방적으로 거부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 나라는 1930년대부터 나치 독일의 팽창 움직임을 심각하게 경계하며 동맹 체결, 군비 재건 등 여러 가지 억지 수단을 동원해 왔습니다. 다만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을 우려한 나머지 정면 충돌은 최대한 미루려 했고, 그 결과 이른바 유화정책(Appeasement)이라 불리는 소극적 대응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유화정책으로 기운 배경
1차 세계대전의 깊은 상흔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각각 약 90만 명과 140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입었으며, 참호전의 참혹함을 몸소 겪었습니다. 이러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했고, 지도층 역시 강경책보다 타협을 선호하게 만들었습니다.
대공황과 군사적 준비 부족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양국의 재정을 크게 위축시켰습니다. 특히 영국은 군 현대화에 필요한 예산 확보가 어려웠고, 프랑스는 마지노 선 구축에 방위 자원을 집중하느라 공세적 대응 여력이 부족했습니다. 전쟁 체계가 정비되기 전까지 독일에 도발적으로 맞서기 어렵다는 판단이 유화정책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볼셰비즘에 대한 경계
당시 상당수 보수 정치인들은 나치 독일을 '공산주의 소련을 막는 방파제'로 인식했습니다. 히틀러의 팽창주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련과의 연합보다 독일과의 타협이 덜 위험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1930년대 주요 사건과 두 나라의 반응
라인란트 재진주(1936):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독일군이 라인란트에 진주했을 때도 프랑스는 군사 개입에 나서지 못했고, 영국 역시 사실상 묵인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병합(1938): 안슐루스 때도 실질적인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뮌헨 협정(1938): 영국의 체임버런 총리와 프랑스의 달라디에 총리는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했고, 체임버런은 귀국 후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독일의 요구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전환점: 1939년 봄, 정책의 급선회
1939년 3월 히틀러가 뮌헨 협정의 보장마저 무시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잔여 지역을 무력 점령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 타협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합니다. 같은 해 3월 31일 영국은 폴란드 독립 보장을 공식 선언했고, 8월 25일에는 영국-폴란드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프랑스도 기존의 프랑스-폴란드 동맹을 바탕으로 대독 강경 노선에 동참했습니다.
폴란드 침공과 선전포고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은 9월 3일 오전, 프랑스는 같은 날 저녁 독일에 선전포고를 발표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양국은 즉각적인 대규모 군사 행동에 나서지 않았고, 서부 전선은 한동안 교전 없이 침묵하는 이른바 '가짜 전쟁(Phoney War)' 국면이 이어졌습니다.
결론
요컨대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대결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참화를 기억하고 군사적·경제적 준비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유화정책을 택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야망은 타협으로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양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