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1920-1929): 전쟁의 상처와 문화의 꽃피움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1920-1929): 전쟁의 상처와 문화의 꽃피움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Années folles)'는 1920년부터 1929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며, 눈부신 경제 회복과 왕성한 문화·지적 활동이 특징인 10년이었다. 국제적 데탕트 덕분에 프랑스 산업이 유럽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파리는 문학적·예술적 창작의 활발한 중심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트라우마를 입은 프랑스 사회는 모습을 바꾸었고, 일부 계층은 전쟁을 잊고 삶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표상으로 '광란의 20년대'를 탄생시켰다.

광란의 20년대 초반의 프랑스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1920-1929): 전쟁의 상처와 문화의 꽃피움

1919년 7월 14일, 프랑스 전역이 승리를 축하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이었나? 프랑스는 승전국 중 하나였으나, 그 승리는 '피로스의 승리'였다. 프랑스는 이제 전사자를 헤아려야 했다. 1918년 12월, 전쟁국 차관부는 프랑스 전투 사망자 수를 138만 5천 명으로 집계했다. 프랑스 국기 아래 동원된 866만 명 중 700만 명 이상이 생존했으나, 많은 이들이 전후 즉시 기관지염, 제때 치료받지 못한 상처 등으로 사망했다. 남은 이들은? 전쟁 장애인으로서 승리의 대가를 모두에게 상기시켰다. 사실상 절단 장애인은 2만 5천 명, '얼굴이 망가진 이들(brisés gueules)'은 1만 4천 명으로 추산된다.

인구학적으로 프랑스는 1944년과 달리 출산 붐을 경험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와 달리,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출산율이 급증하지 않았고, 이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여러 국가에 비해 덜 역동적으로 보이던 프랑스 인구 통계를 더욱 흔들었다.

전쟁으로 인한 출생 결손은 14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인간의 출혈(굴곡진 세대)'은 연령 피라미드의 형태를 바꾸고 전반적인 인구 고령화를 초래했다. 1920년대 초반부터 60세 이상 인구 비율이 이미 13.5%를 넘어 유럽 최고 수준 중 하나였다. 가수들은 유명한 풍자구를 불렀다. "왜 60대 정치인을 뽑나? 70대는 죽었으니까!"

입법적으로는 1920년 7월 31일 낙태 처벌법이 통과되었다. 반면 대규모 이민이 장려되었다. 1920년대 동안 100만 명 이상의 이민자가 프랑스로 유입되었다. 이민자 비율은 1911년 2.7%에서 1931년 6.96%로 상승했다. 이 시점 프랑스는 "인구 대비 이민자 수로 세계 제1의 이민 국가, 미국을 앞선다"(랄프 쇼어)고 평가받았다.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1920-1929): 전쟁의 상처와 문화의 꽃피움

이 구원의 이민 물결에서 폴란드인이 가장 많았고, 지중해 국가(포르투갈, 이탈리아) 출신 그룹이 그 뒤를 이었다. 그 결과 북부 일부 도시(당시 파리, 북부, 동부가 지리적으로 이민자 최다 지역)는 폴란드인 거의 전적으로 거주하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쿠르가 대표적이다.

이 끔찍한 인명 피해에 물질적 피해도 더해졌다. 전쟁은 북부와 동부의 10개 데파르트망을 휩쓸었고, 이곳에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다. 생캥탱처럼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도 있었다. 건축물 피해는 막대했으며, 루앙 대성당 파괴가 그 상징이다. 45만 채의 주택이 완전 또는 부분 파괴되었고, 5,000km의 철도 노선이 마비되었다. 프랑스가 '데데르(마지막 전쟁)'가 되길 바라던 이 전쟁에서 치른 대가는 컸으며, 이는 정치적 변화의 동력이 되었다.

국민 블록에서 국민 연합으로

"우리 역사에서 이만큼 부정적 이미지로 남은 시기도 드물다"(장자크 베케르, 세르주 베른스타인)고 평가받는 국민 블록(Bloc National). 중도와 우파의 연합인 국민 블록은 1919년 11월 16일, 전후 첫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했다. 다수 의원이 참전 용사여서 의회는 프랑스 군복 색깔에서 따온 '지평선색 의회(Chambre bleu horizon)'라 불렸다. 클레망소가 대통령을 희망했으나, 반성직주의와 권위주의 탓에 실패했다.

1920년 1월 폴 데샤넬을 대통령으로 임명하며, 대통령의 신중함을 전통으로 삼는 관행으로 회귀했다. 국민 블록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외교 현안, 즉 전쟁은 끝났으나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회의 종료 후, 새로운 전쟁을 막을 해법을 찾는 것이 과제였다.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1920-1929): 전쟁의 상처와 문화의 꽃피움

평화 기구로 국제 연맹(SDN)이 출범했으나 무장력이 없어 한계를 드러냈다. 국제 연맹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이었고, 무력 위협 없는 공식 비난은 지도자들이 무시하기 쉬웠다. 그래도 1920년대에는 국제 연맹이 안심을 주었고, 그것이 중요했다.

프랑스는 재무장관 뤼시앙 클로의 말대로 "독일이 배상하길" 바랐을 뿐 아니라 강력히 요구했다. 여러 위원회와 계획이 독일의 전쟁 배상금 액수를 정하려 했으나, 독일이 크게 거부하자 프랑스는 1923년 공업 지대인 루르를 점령해 석탄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국제적 항의로 곧 철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영국과 미국이 프랑스의 요구를 막았다. 이들은 혁명(이미 독일과 러시아에 퍼짐)이 독일로 번질 것을 우려했다. 영미 지도자들은 프랑스가 원하듯 독일을 무릎 꿇리길 거부했다. 재정적·도덕적으로 패배한 국가는 혁명 사상에 기울기 쉽기 때문이다. 결국 여러 경제학자, 특히 존 메이너드 케인스(<평화의 경제적 결과>)의 작업으로 배상금은 지속적으로 감축되었다.

국내에서는 1920년 12월 25~30일 투르 대회에서 좌파가 분열했다. 프랑스 노동자 인터내셔널 지부(SFIO)가 제3 인터내셔널에 가입할지, 이를 위해 21개 조건을 수용할지가 쟁점이었다. 다수(마르셀 카생, 뤼도비크 오스카 프로사르)는 수용했고, 소수(폴 포르, 레옹 블룸)는 "옛집을 지키겠다"며 거부했다. 대회 결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PCF의 전신)가 결성되어 모스크바 노선을 따르는 이들이 모였다. 프랑스 좌파는 분열했고, 노동조합에서도 1921년 CGT-U 결성으로 분열이 생겼다.

좌파 카르텔

1924년 총선에서 급진파와 사회당의 연합인 좌파 카르텔(Cartel des Gauches)이 승리하며 국민 블록의 종언을 고했다. 알렉상드르 밀랑 대통령이 사임하고 카르텔은 폴 팽르베를 후임으로 내세웠으나, 결국 상원의장 가스통 두메르그가 당선되어 카르텔의 분노를 샀다. 카르텔 정책은 반성직주의(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관 폐쇄)와 재정 적자 해소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 프랑스는 재정난에 시달렸고 적자가 막대했다. 이는 국무회의 의장 에두아르 에리오의 주요 걸림돌이었고, 적자 감축 노력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1926년 7월 21일, '카르텔 실험'은 막을 내렸다.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1920-1929): 전쟁의 상처와 문화의 꽃피움

금융가들과 프랑스 은행이 카르텔을 무너뜨렸다. 1914년 신성 연합의 아버지이자 1913년 대통령에 당선됐던 레몽 푸앵카레가 카르텔의 즉각적 후계자가 되었다. 푸앵카레가 이끈 국민 연합(Union Nationale) 시기는 국민 블록과 카르텔 시기와 대비되는 정점으로 보인다. 프랑스는 신뢰를 회복했고, 경제가 개선되었으며, 사회는 타문화에 개방되고 점차 전쟁을 잊어갔다.

광란의 20년대: 아방가르드의 시대

인구학적으로 약화된 프랑스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농촌 사회가 점차 도시 사회에 밀려났다. 1931년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를 앞질렀다(도시의 기준은 무엇인가? 2,000명 기준이 타당한가?). 대중문화의 맹아도 서서히 나타나 1930년대를 예고했다.

문화·예술·종교 생활은 풍요로웠다. 광란의 20년대 파리는 초현실주의의 본거지였다.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로베르 데노스, 폴 엘뤼아르 등은 프로이트주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표현을 자유롭게 펼쳤다. 자동 기술법, 최면, 기묘한 오브제 창작, 1926년 '절묘한 시체(exquisite corpse)' 게임 고안 등 참여자들이 무작위로 적은 단어로 문장을 재구성하는 놀이를 시작했다.

에리크 사티가 음악 미학을 쇄신했다. 초현실주의자와 가까웠던 이 익살스러운 음악은 '6인조(Les Six)'(다리우스 미요, 아르튀르 오네게르, 프랑시스 풀랑크, 조르주 오리크, 루이 뒤레, 제르멘 타이유페르)의 '페티시'로 추앙받았다. 장 콕토의 후원 아래 각기 다른 기질의 이들은 인상주의 음악과 드뷔시(1918년 작고)의 영향에 맞서 다조성과 다리듬을 추구했다. 1925년 가난 속에 죽은 카바레 피아니스트 사티는 리듬의 대담함과 장난을 사랑했다. 작곡에 유머러스한 제목을 붙이고(『개를 위한 진짜 축 늘어지는 전주곡』, 『배 모양의 세 조각』...), '예상치 못한 음표'로 듣는 이를 놀라게 하거나 웃겼다. 모리스 라벨은 1928년 유명한 『볼레로』를 작곡했다. 뱅상 댕디는 세자르 프랑크의 사상을 계승해 1931년 작고할 때까지 작곡을 가르쳤다.

지드의 『누벨 르뷔 프랑세즈』가 번성했고, 전쟁 문학(롤랑 도르젤, 앙리 바르뷔스, 조제프 케셀의 『승무원』 등)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계는 시기 말 유성 영화가 등장했으나, 미국보다 수년 늦었다. 프랑스 영화 산업은 벨 에포크 시절 세계에 수출하며 지배했던 때보다 훨씬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프랑스의 새로운 삶의 예술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1920-1929): 전쟁의 상처와 문화의 꽃피움

이제 프랑스 영화는 할리우드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할리우드는 제1차 세계대전을 활용했을 뿐 아니라, 전후 프랑스에 불어온 친미풍(Americanophilia)의 수혜도 입었다. 벨 에포크의 상징이던 카페 콘세르가 쇠퇴하고 조제핀 베이커 등으로 대표되는 뮤직홀이 등장했다. 미국 춤인 시미와 특히 1920년대 중반 찰스턴이 유행했고, 루이 암스트롱과 베니 굿맨의 재즈와 스윙 열풍이 불었다. 미스탱게트(물랭 루주 공연), 프레엘, 모리스 슈발리에 등이 스타로 떠올랐고, 라디오 보급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라디오 수신기는 1925년 50만 대, 1927년 60만 대로 급증했다.

패션계에서는 코코 샤넬이 아이콘으로 군림했고, 아르데코 양식이 건축과 디자인을 지배했다. 서면 언론에서는 1914년 이미 일간지 1위였던 『르 프티 파리지앵』이 일일 150만 부 이상을 찍으며 성장했고, 스포츠·음악 전문지 등 신문의 다양화도 이어졌다.

프랑스의 광란의 20년대(1920-1929): 전쟁의 상처와 문화의 꽃피움

1920년대가 '광란의 20년대'라 잘못 불렸다 해도, 사회가 변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보이시 룩(garçonne)'은 신화로 남았고, 여성은 여전히 가정에 머물길 권유받았다(10년대 초 출산 장려 정책이 '여성의 의무는 프랑스에 아이를 낳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이 점에서 전후 프랑스 여성의 지위는 전혀 바뀌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은 여성들을 해방시키지 못했다. 프랑스 여성 중 취업 여성 비율은 1911년 37.7%에서 1931년 35.5%로 오히려 소폭 감소했다.

광란의 20년의 종언

사실 문화 영역에서 예외적으로 풍요로웠던 점을 제외하면, 광란의 20년대는 여전히 경직된 사회 구조(여성 고용은 제대 후 거의 살아남지 못함), 농촌에 뿌리박힌 보수성, 저축 성향, 대전 승전국이면서도 새 전쟁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며 내면적 평화주의에 조심스럽게 웅크린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이 평화주의는 전체주의 이념, 특히 나치 이념의 부상 앞에서 프랑스를 약화시켰다.

1929년 경제 위기가 이 제2의 '벨 에포크'를 갑작스럽게 중단시켰다.

참고 문헌

격동의 시기라 개괄적 조명만 가능해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개요에 그치므로, 관심 있는 독자는 다음 서적을 참고하기 바란다:

- 『광란의 20년대』, 미리암 후안 지음. 무슨 책인가, 2021

- 프레데리크 모니에, 『1920년대』, "현대 프랑스", 르 리브르 드 포슈, 파리, 1999.

- 애니 골드만, 『광란의 20년대』. 카스테르만,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