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벤저민 프랭클린은 '5분의 3 타협'을 좋아했을까?

미국 헌법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치 중 하나인 '5분의 3 타협(Three-Fifths Compromise)'.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타협에 대해 긍정적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프랭클린은 이 타협이 성립될 당시 살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회의장에 직접 참석한 대표였습니다. 다만 그가 평생 노예제에 비판적 입장을 유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조항을 속으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5분의 3 타협이란?

5분의 3 타협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헌법 제정 회의에서 합의된 조항으로, 하원 의석 수와 직접세를 배분할 때 노예 1명을 인구 1명이 아닌 '5분의 3명'으로 계산하기로 한 것입니다.

남부 노예주들은 노예를 완전한 인구로 인정받아 의석수를 늘리고자 했고, 북부 자유주들은 노예에게 선거권이 없다는 이유로 인구 산정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양측의 첨예한 대립 끝에 나온 절충안이 바로 '5분의 3'이라는 숫자였습니다.

흔한 오해 바로잡기

일부 자료에서는 프랭클린이 이 타협이 이루어지기 십여 년 전에 이미 사망해 발언권이 없었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는 헌법 제정 회의가 열린 지 약 3년 뒤의 일입니다. 즉, 그는 타협이 논의되던 1787년에 81세의 고령으로 펜실베이니아 대표단 일원으로 회의에 참석해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의 실제 입장은?

5분의 3 조항 자체에 대해 프랭클린이 남긴 직접적인 발언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그는 회의에서 연설을 자주 하지 않았고, 준비한 연설문도 동료 대표가 대신 읽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를 보면 그의 입장은 어렵지 않게 추론됩니다. 프랭클린은 말년에 펜실베이니아 노예 폐지 협회 회장을 맡아 폐지 운동을 이끌었고, 1790년에는 미국 의회에 노예제 폐지를 촉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했습니다. 죽기 한 달여 전에는 노예제 옹호 논리를 풍자하는 글을 집필하는 등, 생애 마지막 공적 활동을 노예제 반대에 바쳤습니다.

결론

따라서 '프랭클린은 5분의 3 타협을 좋아했는가?'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타협이 이루어질 당시 생존해 회의에 참석했던 인물이며, 노예제에 근본적으로 반대했던 그의 신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타협을 마음 내키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갓 태어난 공화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타협이 필요하다는 현실론 또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