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1337~1453)을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은 '영국의 패배'로 기억한다. 프랑스 영토를 거의 모두 잃고 유럽 대륙에서 철수한 결과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단순한 승패표로 정리되지 않는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은 결코 한순간도 약자였던 적이 없었고, 오히려 극적인 승리의 연속으로 전쟁을 주도해 왔다.
장궁으로 쓰러뜨린 기사 시대
전쟁 초기 영국은 압도적인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의 장궁병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 기사단을 궤멸시켰다. 10년 후인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직접 포로로 잡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정점은 1415년 아쟁쿠르 전투였다. 헨리 5세가 이끄는 소수의 영국군은 기아와 질병으로 지친 상태에서도 프랑스 귀족 중심의 대군을 격파하며 군사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두었다.
왕좌까지 한 걸음 남았던 영국
영국의 우위는 단순한 전술적 승리에 그치지 않았다. 1420년 체결된 트루아 조약에 따라 헨리 5세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상속자로 인정받았다. 즉, 영국은 프랑스 왕관을 손에 넣기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헨리 5세 사후에도 섭정 베드포드 공작은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북부 대부분을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급반전, 그리고 1453년의 종말
그러나 전세는 1429년 잔다르크가 오를레앙 포위전을 돌파하면서 뒤집혔다. 샤를 7세가 랑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프랑스군이 체계적으로 재정비되면서 영국은 점차 영토를 내주기 시작했다. 마침내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했다.
'패배'라는 이름표를 어떻게 붙일 것인가
결국 백년전쟁의 최종 결과는 프랑스의 승리였다. 하지만 영국이 '진 패자'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인구와 자원 면에서 열세였던 나라가 100년 넘게 전쟁을 주도하고, 적국의 왕위 계승권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륙 영토를 정리한 이후 영국은 해양 강국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이는 훗날 대영제국 건설의 초석이 되었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은 영토를 잃었지만, 굴욕만은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