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아우슈비츠와 '최종 해결책': 홀로코스트, 인류가 기억해야 할 절대악

아우슈비츠, 나치 최대의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와  최종 해결책 : 홀로코스트, 인류가 기억해야 할 절대악아우슈비츠(Auschwitz)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약 60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나치 강제수용소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이다. 1940년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에 따라 절멸수용소로 건설되었으며, 1942년부터는 이른바 '최종 해결책(Endlösung)', 즉 유대인에 대한 체계적 학살이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 2015년에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해방 70주기를 맞아 추모 행사가 열렸다. 히틀러의 인종주의 이념, 그러니까 독일 민족이 열등하다고 규정된 다른 인종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에 따라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음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 이념을 바탕으로 쇼아(Shoah), 히브리어로 '재앙'이라 불리는 대참극이 자행되었고, 냉철하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이 학살은 약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최종 해결책'의 등장

힘러, 아이히만, 하이드리히 등 나치 고위 간부들이 구상한 '최종 해결책' 프로젝트의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절멸이었다. 1943년 10월 4일 무장친위대(SS) 장군들을 앞두고 행한 하인리히 힘러의 연설은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우슈비츠와  최종 해결책 : 홀로코스트, 인류가 기억해야 할 절대악제3제국의 초기 목표는 제국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나치의 지배 아래 놓인 유대인 집단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마련된 계획은 이들을 '동방으로', 다시 말해 소련 쪽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으나, 특정 용어의 사용이 훨씬 더 잔혹한 현실을 감추고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소 불가침 조약이 파기되자,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동방의 모든 영토를 정복해 그곳으로 유대인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 야망은 모스크바 성문 앞에서 좌절된다. 혼란과 경악이 지나간 뒤 소련군이 반격에 나섰고, 이는 독일군 후퇴의 시작이자 군사적 패배를 의미했다.

그로부터 유대인에 대한 절멸과 체계적 제거 프로젝트가 본격화되었다. 이를 통해 히틀러 이념의 정점에 도달한 셈이다. 기근으로 상징되는 게토(유대인 격리구역)화와 그 잔혹함에 이어 절멸이 이어졌고, 낙인찍힌 이들의 일상은 '생존'이라는 개념이 지배했다. 나치군이 지난간 지역을 샅샅이 뒤지며 정치적 반대파, 특히 유대인을 색출하던 특별작전집단(Einsatzgruppe)이 자행한 반복적 폭력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유대인을 무조건 살해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독일은 또한 '동맹국', 아니 속국이라 해야 할 국가들을 동원해 유대인 추방을 유럽 전역으로 확대했다. 프랑스 역시 그렇게 '초대'받았는데, 1942년 7월 벨디브(Vel d'Hiv) 검거 작전 직전 비시 정부 경찰총감의 발언이 이를 보여준다.

이 발언에서 단어의 무게, 그리고 무엇보다 침묵의 무게는 때때로 그 어떤 것보다도 크다. 이 문서는 프랑스가 '초대받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주권을 유지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촘촘한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매우 외교적인 '초대'라는 단어 뒤에는 '명령'이라는 단어를 읽어야 한다. 게다가 이 문서는 이미 절멸 과정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이 유대인들이 향하는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다. 이 메시지의 여러 표현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죽음으로의 보내짐이다.

절멸수용소

헬름노, 베우젝, 소비보르, 트레블린카, 그리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이 절멸수용소들은 '최종 해결책' 프로젝트의 실행 장치였다. 5년에 걸쳐 이 체계적 살인 과정이 유럽 대륙에서 자행되었고, 나치는 이 강제수용소 군락 내부에서 저질러진 공포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려 했다.

절멸 장소의 지리적 위치는 세심하게 설계되었다. 1939년 이전 국경 내의 폴란드가 선택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동부 원정의 지정학적 요충지였다는 점, 무엇보다 유럽 최대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한 땅이라는 점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높은 밀도의 철도망으로 상징되는 교통 축의 존재가 이를 한층 수월하게 만들었다. 또한 울창한 삼림과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광활한 지역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비밀 엄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는 특히 힘러의 결정에 따라 나치 고위 간부들에 의해 유럽 유대인 대량 섬멸의 중심지로 공식 선정되었다. 철도 호송열차가 이 수용소에 도착하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끌려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도착 즉시 가스(치클론 B)로 살해되었다. 노동이 가능한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유대인 사이에 '선별'이 이루어졌는데, 후자에게 죽음은 즉각적인 것이었다. 전자에게도 그것은 몇 주, 많아야 몇 달에 불과한 짧은 유예에 지나지 않았다. 트레블린카의 생존자 아브라함 봄바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언을 남겼다.

아우슈비츠와  최종 해결책 : 홀로코스트, 인류가 기억해야 할 절대악전쟁 말기, 붉은 군대의 접근에 공포를 느낀 나치는 이 절멸수용소들이 남긴 증거의 체계적 파괴에 착수했다. 그 시도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영국군과 미군은 인간의 집단 무덤과 1940년부터 1945년까지 5년간의 전쟁 동안 실제로 벌어졌던 일의 실체를 목격하며 "경악, 분노, 수치심, 죄책감, 두려움이 뒤섞인 폭발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세계가 침묵하는 가운데, 유럽 유대인의 3분의 2,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이 나치에 의해 계획적인 섬멸에 따라 살해되었다." 그들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태어난 죄'(안 그랭베르크)를 지었을 뿐이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제노사이드요, 인류 전체의 재앙이었다.

2015년 추모 행사와 생존자들의 증언

2015년 추모 행사를 통해 기억과 역사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역사가들의 분석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졌다. 유럽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긴 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제노사이드로부터 70년이 흘렀고, 생존자들의 증언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10년 뒤면 생존자들이 직접 경험한 사실에서 나오는 생생한 기억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문학과 글만이 이 어두운 과거의 유일한 기록원으로 남아, 그토록 되풀이되어 온 '다시는 없기를(Never Again)'이라는 소망이 실현되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최종 해결책 : 홀로코스트, 인류가 기억해야 할 절대악생존자들의 증언 가운데는 이탈리아 출신 작가이자 이 제노사이드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거듭 언급되었다. 그의 말만이 '절대악'(아네트 비에비오르카)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 안 그랭베르크, 『쇼아, 잊을 수 없는 것』(La Shoah, l'impossible oubli), 갈리마르 디스커버리, 1995

- 아네트 비에비오르카, 『1945, 발견』(1945, la découverte), 쇠유(Seuil), 2015년 1월

- 루돌프 회스, 『아우슈비츠의 사령관이 말한다』(Le commandant d'Auschwitz parle), 포켓 디스커버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