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종교전쟁 (1562~1598): 36년간의 분열과 앙리 4세의 화해

16세기 프랑스를 뒤흔든 종교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위그노) 사이의 길고 잔혹한 내전이었다. 전통적으로 8차례의 전쟁(1562~1598)으로 구분되지만, 실상은 36년간 지속된 하나의 긴 분쟁에 가까웠다. 전투는 주로 장기간의 공성전으로 이루어져 결정적인 승부가 드물었고, 양측의 피로감이 휴전 조약의 주된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생바르텔레미 학살과 같은 참극은 프랑스 역사상 유례없는 잔혹함으로 반복되었다. 이 비극의 역사는 앙리 4세가 1598년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을 반포하며 신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비로소 막을 내렸다.

종교전쟁의 배경: 억압과 저항의 악순환

갈등의 씨앗은 루터의 사상이 프랑스에 전해진 1520년대 초부터 싹텄다. 1521년 루터의 저서가 금서로 지정되면서 첫 탄압이 시작되었고, 앙리 2세 치세(1547~1559)에는 '화형 법정(Chambre Ardente)'을 설치해 이단 심문을 강화하며 탄압이 정점에 달했다. 1559년 앙리 2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권력 공백을 낳았다. 프랑수아 2세(재위 1559~1560)의 단명과 어린 샤를 9세(재위 1560~1574)의 즉위로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실권을 쥐었지만, 왕권은 기즈 가문(가톨릭 강경파)과 부르봉-콩데 가문(개신교 지도자)이라는 두 귀족 세력 사이에서 위태로웠다.

1560년 암부아즈 음모는 위그노 귀족들이 기즈 가문의 영향력에서 어린 왕을 구출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임박한 내전의 전조였다. 탄압과 유화 정책이 반복되는 가운데, 1562년 1월 생제르맹 칙령이 위그노에게 제한적 예배 자유를 주자 가톨릭 강경파가 격분하며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제1차 전쟁과 바시 학살 (1562~1563)

1562년 3월,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샹파뉴 지방 바시(Vassy)에서 예배 중이던 위그노들을 학살하면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콩데 공 루이 1세가 군대를 일으켜 맞섰고, 위그노군은 북부를 제외한 전국으로 빠르게 세력을 넓혔다. 12월 드뢰 전투에서 기즈 공작의 활약으로 가톨릭 측이 승리했으나, 이듬해 2월 오를레앙 공성전 중 기즈 공작이 암살당하며 전황은 다시 안갯속으로 들어갔다. 1563년 3월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중재로 암부아즈 칙령(평화)이 체결되며 1차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위그노의 예배 장소는 귀족 영지와 일부 도시로 한정되는 등 근본적 해결은 요원했다.

불안한 평화와 제2·3차 전쟁 (1564~1570)

샤를 9세의 성년식과 전국 순행(1564~1566)을 통해 화합을 시도했으나, 1567년 네덜란드에서 펠리페 2세가 칼뱅파 반란을 진압하자 위그노들이 자극받아 모의 기습(Surprise de Meaux)으로 왕을 납치하려다 실패했다(제2차 전쟁). 1568년 롱주모 평화로 잠시 숨을 돌렸으나, 샤를 9세가 생모르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전쟁은 재개되었다(제3차 전쟁). 자르낙 전투에서 콩데 공이 전사하고 몽쿠투르 전투에서 위그노군이 대패했지만, 왕실의 재정난으로 1570년 8월 생제르맹앙레 평화가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위그노에게 양심의 자유와 라로셸, 시뇨르, 몽토방, 라샤리테 4개의 보장 도시(place de sûreté)를 부여하며 비교적 위그노에게 유리했다.

생바르텔레미 학살의 비극 (1572)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571년 콜리니 제독이 궁정으로 복귀해 반스페인 정책을 펴자 가톨릭 강경파의 반발이 거세졌다. 1572년 8월 18일, 나바르 왕 앙리(훗날 앙리 4세)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혼인으로 화해 무드가 조성되는 듯했으나, 나흘 뒤 콜리니 제독이 암살 미수를 당했다. 공포와 증오가 뒤엉킨 파리에서 8월 24일 성 바르텔레미 축일 밤, 생바르텔레미 학살이 자행되었다. 파리에서만 약 3,000명, 전국적으로 약 1만 명의 위그노가 성별, 연령,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시신을 훼손해 '악마를 도려낸다'는 광기 어린 살육은 며칠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쟁의 수렁과 '위그노 국가'의 등장

학살의 여파로 위그노는 국외 망명(위그노 망명), 신앙 포기, 또는 지하 신앙으로 내몰렸다. 나바르 왕 앙리와 콩데 앙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위그노 내부의 급진화를 불렀다. '군주살해론자(Monarchomaques)' 이론이 대두되며 폭군에 대한 저항권이 주장되었고, 1573년 12월 남부 연합 주(Provinces de l'Union)가 결성되어 사실상 '위그노 국가'를 선포했다. 1581년 나바르 왕 앙리가 총독이 되어 이 공화제를 군주제적 체제로 전환시켰다.

동시에 1574년부터 '불만파(Malcontents)' 운동이 일어났다. 왕의 전제적 권력 강화에 반발한 가톨릭·개신교 귀족들이 연대했고, 왕의 동생 프랑수아 달랑송이 가세하며 제5차 전쟁(1574~1576)으로 비화했다. 1574년 샤를 9세 사망과 앙리 3세 즉위 후, 1576년 보비유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파리와 8개 도시를 제외한 전국적 예배 자유와 8개 보장 도시가 주어졌으나, 이는 가톨릭 강경파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앙리 3세와 성전(聖戰, La Ligue)의 시대

1576년 페로네에서 결성된 성전(La Ligue)은 보비유 칙령 폐기를 목표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기즈 공작 앙리가 주도권을 쥐자 앙리 3세는 자신이 성전의 수장이 되어 통제하려 했다. 1577년 라샤리테 전투 승리 후 푸아티에 칙령으로 위그노 권리를 대폭 축소했으나, 산발적 충돌은 계속되었고 콩데 공은 독일로 망명했다.

1580년대 들어 전쟁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며 종말론적 열기 속에 최악의 폭력성을 띠었다. 앙리 3세는 고행 형제단에 가입하고 궁정을 재편하며 개인적 권력을 강화했지만, 재정난과 민심 이반으로 입지는 좁아졌다. 1584년 동생 프랑수아 달랑송이 죽자, 개신교도인 나바르 왕 앙리가 법적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가톨릭 강경파는 이를 종말의 징조로 받아들여 주아빌 조약(1584)으로 스페인 펠리페 2세와 동맹을 맺고 새로운 성전을 결성했다. 앙리 3세는 1585년 7월 성전의 수장이 되어 위그노 신앙 말살을 맹세했으나, 실상은 성전파(대다수 불만파)와의 불편한 동거였다. 1587년 10월 쿠트라 전투에서 나바르 왕 앙리가 대승을 거두며 전세는 다시 요동쳤다.

기즈 공작 암살과 앙리 3세의 최후

성전은 점점 왕권을 압박했다. 1588년 5월 바리케이드의 날, 파리 시민이 봉기해 앙리 3세를 파리에서 쫓아냈다. 왕은 에스타 제네랄(삼부회)을 블루아에서 소집해 시간을 벌다가, 12월 23~24일 기즈 공작 앙리와 추기경 형제를 암살하고 시신을 훼손해 태우는 강수를 뒀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를 낳았다. 성전 잔당은 더욱 급진화해 왕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했고, 1589년 5월 교황 식스토 5세가 앙리 3세를 파문하며 시해 선동이 노골화되었다.

앙리 4세의 즉위와 전쟁의 종식

사면초가에 몰린 앙리 3세는 1589년 4월 나바르 왕 앙리와 손잡고 파리 진군을 개시했다. 그러나 8월 1일 생클루 진영에서 도미니크회 수도사 자크 클레망에게 피살당했고, 죽기 전 나바르 왕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앙리 4세는 성전 내부 분열(스페인 옹호 강경파 vs 마옌 공작 파)을 이용해 아르크 전투(1589)와 이브리 전투(1590)에서 연승했으나, 파리 공략에는 실패했다. 1591~1592년 루앙 공략도 스페인 원군 앞에서 좌절되었다.

전세는 앙리 4세의 개종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파리는 미사 한 번이면 된다(Paris vaut bien une messe)"는 말로 유명한 그는 1593년 7월 25일 생드니 대성당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594년 2월 샤르트르에서 대관식(랭스는 성전파 점령)을 치른 뒤 3월 파리에 무혈 입성했다. 이후 무력과 협상을 병행해 남은 성전 거점을 정리하고, 1595년 6월 퐁텐프랑세즈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1598년 5월 2일 베르뱅 조약으로 스페인과 강화하고, 앞선 4월 13일 낭트 칙령을 반포해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와 100여 개의 보장 도시,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며 36년간의 종교내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연표: 프랑스 종교전쟁 주요 일지

전조 (1560)

  • 1560: 암부아즈 음모 발생, 주모자 처형

제1차 전쟁 (1562~1563)

  • 1562. 3: 바시 학살, 전쟁 발발
  • 1562. 10: '삼두정치'(기즈, 생트안드레, 몽모랑시) 루앙 점령
  • 1563. 2: 기즈 공작 프랑수아, 오를레앙 공성 중 암살
  • 1563. 3: 암부아즈 화해 칙령

제2차 전쟁 (1567~1568)

  • 1568. 3: 롱주모 평화

제3차 전쟁 (1569~1570)

  • 1569. 3: 자르낙 전투, 앙주 공작 승리, 콩데 공 전사
  • 1569. 10: 몽쿠투르 전투, 앙주 공작 승리
  • 1570. 8: 생제르맹앙레 평화, 양심 자유 및 4개 보장 도시 부여

생바르텔레미 학살 (1572)

  • 1572. 8. 24: 파리에서 학살 개시, 전국 확산, 약 1만 명 사망

제4차 전쟁 (1572~1573)

  • 1573. 7: 라로셸 공략 실패, 라로셸 조약으로 라로셸·님·몽토방 위그노에 양도

제5차 전쟁 (1574~1576)

  • 1575. 10: 도르망 전투, 기즈 공작(르 발라프레) 승리
  • 1576. 5: 보비유 칙령, 파리 등 8곳 제외 전국 예배 자유, 8개 보장 도시
  • 1576. 6: 성전(La Ligue) 결성

제6차 전쟁 (1576~1577)

  • 1577. 5: 앙주 공작 라샤리테 점령
  • 1577. 9: 베르제라크 평화, 보비유 칙령 축소

제7차 전쟁 (1579~1580)

  • 1579. 2: 네라크 평화, 위그노 15개 의석 획득

제8차 전쟁 '삼앙리 전쟁' (1585~1598)

  • 1584: 주아빌 조약(기즈-펠리페 2세 동맹)
  • 1585. 7: 앙리 3세 성전 수장 자처, 나바르 왕 앙리 계승권 박탈
  • 1587. 10: 쿠트라 전투, 나바르 왕 앙리 대승
  • 1588. 5: 바리케이드의 날, 앙리 3세 파리 탈출
  • 1588. 12: 블루아에서 기즈 공작 암살
  • 1589. 4: 플레시레투르 조약, 앙리 3세와 나바르 왕 앙리 동맹
  • 1589. 7~8: 파리 포위, 앙리 3세 피살, 나바르 왕 앙리 4세로 즉위
  • 1589. 9: 아르크 전투, 앙리 4세 승리
  • 1590. 3: 이브리 전투, 앙리 4세 승리, 파리 공략 실패
  • 1593. 7: 앙리 4세 가톨릭 개종
  • 1594. 3: 앙리 4세 파리 입성
  • 1595. 6: 퐁텐프랑세즈 전투, 스페인군 격파, 마옌 공작 귀순
  • 1598. 4: 낭트 칙령 반포
  • 1598. 5: 베르뱅 조약, 스페인과 평화

참고 문헌

  • D. CROUZET, Les guerriers de Dieu (La violence au temps des troubles de religion, vers 1525-vers 1610), Champ-Vallon, 2009 (1ère éd. 1990).
  • A. JOUANNA, J. BOUCHER, D. BILOGHI, G. LE THIEC, Histoire et Dictionnaire des Guerres de religion, Gallimard, 1998.
  • W. KAISER (dir), L'Europe en conflit (Affrontements religieux et genèse de l'Europe moderne, vers 1500-vers 1650),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