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펠리페 5세가 세르베라에 남긴 '논쟁적 선물': 스페인 계승전쟁과 세르베라 대학의 탄생 비화

펠리페 5세가 세르베라에 남긴  논쟁적 선물 : 스페인 계승전쟁과 세르베라 대학의 탄생 비화

카탈루냐의 작은 도시 세르베라(Cervera)를 처음 방문하는 분이라면, 그리고 이 도시의 역사를 잘 모르신다면, 조용한 이 마을이 어떻게 스페인 전역에서 손꼽히는 대학 캠퍼스로 거듭났는지 다소 의아해하실 수 있습니다.

펠리페 5세가 세르베라에 남긴  논쟁적 선물 : 스페인 계승전쟁과 세르베라 대학의 탄생 비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세르베라와 대학의 인연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당시의 사건들과 연결 짓는 내용입니다. 역사적 사실의 맥락을 짚는 것이지, 오늘날의 시사 문제를 판단하거나 카탈루냐 관련 정치 논쟁에 개입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왕위 계승 문제

이야기는 1700년, 후사 없이 병약했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서거하면서 시작됩니다. 그의 죽음으로 1516년부터 이어져 온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계승 서열은 처음으로 끊어지게 됩니다.

스페인 왕좌를 놓고 경쟁한 후보는 세 명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잇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로스(훗날 카를로스 3세)였습니다. 두 번째는 카를로스 2세의 누이 마르가리타 데 아우스트리아의 손자인 호세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였으나, 1699년 그가 갑작스럽게 요절하면서 순위가 재편되었습니다. 그리고 카를로스 2세가 최종적으로 지목한 후계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립, 즉 훗날의 펠리페 5세였습니다.

펠리페 5세가 세르베라에 남긴  논쟁적 선물 : 스페인 계승전쟁과 세르베라 대학의 탄생 비화

카를로스 2세가 앙주 공작 필립을 지명한 결정적 이유는, 경쟁 세력들이 바라던 스페인 제국의 분할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럽을 집어삼킨 국제적 계승전쟁

프랑스가 스페인 왕좌를 차지하게 되자 유럽 전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두 강대국의 통합을 용납할 수 없던 열강들은 스페인 본토와 전 세계 식민지를 걸고 개입에 나섰습니다. 한쪽에는 부르봉가의 펠리페 5세를 지원하는 프랑스, 나폴리, 바이에른, 스페인이, 다른 한쪽에는 오스트리아 대공을 지지하는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연합주, 사보이아, 프로이센 등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안의 계승전쟁, 실질적인 내전

여기서부터가 이야기의 가장 복잡한 대목입니다. 스페인 내부에서 이 전쟁은 사실상 내전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넓게 보면 2세기 전 가톨릭 군주들의 혼인으로 통합된 옛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 간의 대립으로 환원되지만, 실상은 훨씬 더 다층적이었습니다.

카스티야는 다소 소극적이었음에도 대체로 부르봉가의 펠리페 5세를 지지했습니다. 반면 아라곤 진영은 오스트리아 대공의 편에 섰는데, 이 지역 내부의 균열은 더욱 컸습니다. 대공에 대한 지지는 주로 부르주아지에게서 나왔는데, 그 배경에는 1694~1697년 프랑스 점령의 기억이 남긴 두려움, 그리고 영국 및 아메리카와의 경제 관계 상실 우려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아라곤 왕관 영지 내 부르봉가에 대한 지지는 귀족층에서 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 맥락 속에서 세르베라 대학이 탄생했다

전쟁은 실질적으로 1715년 초까지 이어졌고, 공식적으로는 1725년 빈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으로 종결되었습니다. 바로 이 전쟁의 여파 속에서 펠리페 5세의 '누에바 플란타 칙령(Decreto de Nueva Planta)'이 탄생했습니다. 이 칙령은 옛 아라곤 왕관의 제도를 폐지하는 것으로 가장 악명이 높지만, 동시에 우리의 주인공인 세르베라 대학의 설립을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펠리페 5세가 세르베라에 남긴  논쟁적 선물 : 스페인 계승전쟁과 세르베라 대학의 탄생 비화

당시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잉크의 강(río de tinta)"이라 불렀을 만큼 방대한 문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확실히 알려진 사실은, 전쟁 배상을 요청하기 위해 세르베라의 대표 두 명이 마드리드를 찾았고, 그 결과 대학 설립 허가를 받아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허가가 내려진 이유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습니다. 일부는 펠리페 5세에게 계승전쟁 중 보여준 세르베라 시민의 충성 덕분에 도시에 하사된 '선물'이라고 해석합니다. 반면 특히 현대에 들어서는 그러한 지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르베라'라는 도시의 이름을 역사에서 지워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상반된 견해가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저는 바르셀로나 대학 사회과학교육학 교수 호아킨 프라츠(Joaquín Prats) 팀의 연구를 참고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합니다. 그의 저서 『세르베라 대학과 부르봉 개량주의』에 이 논지가 상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대학 설립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페인 왕실 전 영토에서 뚜렷한 대학 교육의 쇠퇴를 되돌려야 한다는 필요성이었습니다. 특정 중심 대학을 육성하고 나머지 대학들을 폐쇄함으로써 경쟁을 없애고 새 중심을 명확히 강화하려는 구상이었으며, 세르베라 안건은 바로 이러한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울러 계승전쟁 패배 이후 카탈루냐의 기존 제도가 크게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거점 대학' 모델을 실험하기에 카탈루냐가 이상적인 땅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펠리페 5세가 세르베라에 남긴  논쟁적 선물 : 스페인 계승전쟁과 세르베라 대학의 탄생 비화

세르베라 대학교의 두 안뜰 가운데 하나

그 외에도 세르베라에는 이런 기관이 자리하기에 적합한 조건들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규모가 지나치게 크지 않고, 군사 시설이 없으며, 학생들을 쉽게 관리할 수 있고, 지리적으로 중심부에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 등이 대학을 세르베라로 이끈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에 펠리페 5세에 대한 도시의 우호적 태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 또한 충분합니다.

세르베라 대학, 그 짧지만 화려했던 역사

대학 건물은 1718년부터 1740년까지 건축되었으며, 바로크 양식으로 시작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배출한 인물도 화려합니다. 아이작 페랄과 함께 잠수함을 개발한 나르시소 몽투리올(Narciso Monturiol), 그리고 19세기 스페인 최고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후안 프림(Juan Prim) 장군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주요 학과는 법학, 인문학, 신학, 의학, 철학이었으며, 대학의 명맥은 1840년 바르셀로나로 이전하기까지 이어졌습니다.

펠리페 5세가 세르베라에 남긴  논쟁적 선물 : 스페인 계승전쟁과 세르베라 대학의 탄생 비화

세르베라 대학 강당의 입구

오늘날의 세르베라 대학

현재 이 건물은 세르베라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역사 유적 중 하나입니다. 건물은 용도별로 구획되어 도서관, 컴타르카(군) 기록보관소, 중등학교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UNED(스페인 국립원격대학)의 제휴 센터인 강의실에서는 지금도 수업이 진행 중이며, 필자 또한 이곳에서 지리학과 역사학 과정을 계속 이수하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ub.edu

이미지 출처: commons.wiki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