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양동이 하나 훔쳐 벌어진 중세의 대전쟁, 자폴리노 전투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역시 19세기 중반까지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이탈리아는 왕국과 공화국이 뒤엉킨 거대한 모자이크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조각들은 더욱 잘게 쪼개져 있었다. 문제는 분열 자체보다도 각 조각들이 서로를 깊이 증오했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 도시들 사이에서도 끊임없는 충돌이 반복되었고, 그 갈등은 14세기 게르프(Guelf)와 기벨린(Ghibelline) 사이의 전쟁으로 폭발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전쟁의 기원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알레산드로 타소니(Alessandro Tassoni)가 1622년에 쓴 영웅시 『훔친 양동이(La secchia rapita)』와, 훗날 살리에리가 작곡한 오페라는 그 발단을 물양동이 한 개의 도난에서 찾는다. 물론 실제 원인은 훨씬 깊은 곳에 있었지만 말이다.

게르프와 기벨린, 두 파벌의 탄생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11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는 교황청이 행사하는 영적 권리만큼 자신의 토지 권리도 정당하다고 판단하고, 이탈리아 영토를 제국령으로 편입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본래 독일어권의 용어였던 게르프(Welfen)와 기벨린(Waibinglen)은 지중해 반도로 건너와 각각 교황 지지파와 황제 지지파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진영이 갈렸다. 밀란, 피렌체, 만토바 등은 전자를, 시에나, 피사, 루카 등은 후자를 지지했다.

프리드리히는 도시를 하나씩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밀란, 토르토나, 파비아, 볼로냐, 그리고 토스카나 전역을 손에 넣으며 막힘없이 로마로 진격했다. 교황 알렉산드루스 3세와의 협상은 결실을 맺지 못했고, 황제의 원정은 1176년 5월 29일 롬바르디아 동맹에게 레냐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막을 내렸다. 전투에서 아들마저 잃은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 이탈리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증오와 원한의 유산이었다. 철수 전에 긋혀진 국경선의 봉합 부위는 언제든 터질 듯 팽팽하게 조여 있었다.

모데나와 볼로냐, 40km 거리의 숙적

그 균열이 가장 먼저 터진 곳이 바로 모데나와 볼로냐였다. 기준이 될 권위가 사라진 상황에서 두 도시는 농촌과 상업에 기반한 지역 경제력을 장악하려고 경쟁했고, 새 황제(프리드리히는 1190년에 사망)를 지지할 때도 진영이 갈렸다.

양동이 하나 훔쳐 벌어진 중세의 대전쟁, 자폴리노 전투

여기에 불씨를 지지는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게르프파인 볼로냐와 기벨린파인 모데나는 불과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대 행위가 일어나기에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다. 1296년 볼로냐군이 적영으로 쳐들어가 바차노와 사비뇨를 점령하면서 국경 소규모 충돌의 연쇄가 시작되었다. 이후 수십 년간 두 도시 사이에서는 주고받는 공방이 끊이지 않았고, 인근 마을들은 수시로 주인이 바뀌었다.

1309년에는 모데나, 만토바, 파르마, 레조가 리날도 보나콜시(Rinaldo Bonacolsi)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공격이 더욱 격해졌다. 교황은 보나콜시를 파문했을 뿐 아니라, 그를 제거하는 자에게 면죄부를 내리겠다고까지 선언했다. 당시 교황들은 면죄부를 그렇게 아낌없이 뿌리던 시절이었고, 서방 교회의 대분열이 이미 시작된 무렵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도시 안에서조차 게르프파와 기벨린파가 갈라져 나오기 시작했다. 상황은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고, 1325년 여름 볼로냐군이 감행한 잔혹한 약탈(razzia)은 모데나의 여론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보나콜시의 보복은 9월에 이루어졌다. 그는 주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몬테베글리오 요새를 함락시킨 것이다.

우물에서 훔친 양동이

요새 함락 직후의 혼란 속에서 일부 모데나 병사들은 전투를 피해 도망치는 난민 무리에 섞여 볼로냐 시내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시 중심 광장, 산 펠리체 문 근처에서 익숙한 물통이 달린 우물을 발견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양동이를 훔쳤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도난은 볼로냐 시민들의 분노를 사며 거대한 전쟁 명분(casus belli)으로 번졌다. 왜 그랬을까? 중세 이탈리아 도시들—도시뿐 아니라 도시 안의 구역들까지도—에는 '토템'이라 할 만한 개념이 있었다. 명예와 위신을 상징하는 물건들이었다. 적의 영토에 들어가 설령 초라한 나무 양동이라 해도 전리품으로 가져오는 것은 일종의 위업이었고(인도의 창으로 적을 건드리는 관습을 연상시키는 일이다), 당사자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볼로냐는 물건 반환을 요구했고, 모데나가 거부하자 정면 전쟁을 선포했다. 1325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때까지의 충돌은 이제 다가올 일과 비교하면 아이들 장난에 불과했다. 보나콜시에게는 만토바, 베로나, 밀란, 페라라가 합류했고, 황제 루돌프의 군대까지 가담했다.

양동이 하나 훔쳐 벌어진 중세의 대전쟁, 자폴리노 전투

자폴리노 전투

같은 달, 양측은 오늘날 에밀리아로마냐주 카스텔로 디 세라발레에 해당하는 자폴리노(Zappolino)에서 충돌했다. 일부에서는 이 전투를 당대 이탈리아 최대 규모의 전투로 꼽는다. 아마도 가장 불균형한 전투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병 전력은 양측 비슷하게 약 2천 기씩이었지만, 보병에서는 게르프 측의 우위가 압도적이었다. 볼로냐는 3만 보병을 동원한 반면 모데나는 5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질 녘에 시작된 전투는 겨우 두 시간 만에 결판이 났다. 승자는 모데나였다. 양측 사상자는 합쳐 2천 명 미만으로 추정되지만, 승리한 모데나군은 볼로냐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볼로냐 귀족 26명을 포로로 잡았다.

영원히 돌려주지 않은 양동이

두 달 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실제 평화는 1529년 카를 5세가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면서에야 실현되었다) 모데나는 몬테베글리오와 전쟁 중 빼앗은 다른 영토들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그 유명한 양동이만은 끝내 손에 넣어두었다. 이 양동이는 오늘날 코무날레 궁(Palazzo Comunale)에 보관되어 있으며, 도시를 방문하는 이들은 기를란디나 탑에서 그 복제품을 볼 수 있다.